오원춘 사건
수원 토막 살인 사건
2012년, 경찰의 초동대처가 미흡해서 피해자를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피해자는 300여 개의 토막으로 발견돼서 이 사건을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오원춘은 인육 의혹에 휘말리기도 하는데...
중국 조선족 오원춘의 나이와 태어난 곳부터, 한국에 온 과정, 살인 범행 과정을 따라 정리하였습니다. 더불어 당시 경찰의 문제도 정리했습니다.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은 너무 끔찍한 사건이기에 엽기 중의 엽기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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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춘 사건 - 수원 토막 살인 사건과 오원춘 근황, 인육 의혹 등 정리
수원 오원춘 납치 살인사건
중국 조선족 출신인 오원춘은 1970년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서 태어났습니다. 2007년 9월 취업비자로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건설 현장 등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중국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10월부터는 경기도 수원시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2012년 4월 1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서 오원춘의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하던 28살 회사원 곽□□를 자신의 집으로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입과 몸을 청테이프로 묶고 두 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시도했으나 강한 저항으로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피해자 곽□□는 가정이 어려워서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학력 차별에 비정규직 대우까지 받으며 적은 월급을 받았지만, 그 적은 돈을 모아서 가정에 생활비를 주었고, 혼자 공부하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그날도 택시비 2천원을 아끼려고 1km를 걸어서 집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경찰이 죽게 놔둔 피해자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갇힌 곽□□는 오원춘이 잠시 밖으로 나갔을 때 몰래 112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경찰관의 태도는 완전 엉망이었습니다. 곽□□가 "지동초등학교", "못골 놀이터 가는 길" 등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줬는데도, 납치된 피해자에게 주소가 어떻게 되냐며 반복해서 물었고, 물었던 말을 또 묻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
이렇게 7분 36초의 시간이 낭비되던 중에 범인 오원춘이 들어왔습니다. 곧이어 전화기에서는 잘못했다고 빌며 비명을 지르는 곽□□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화가 난 오원춘은 스패너로 머리를 쳐서 기절시키고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은 경찰이 미흡한 초동 대처를 해 결국 살해당한 것이 되어버린 사건입니다.
경찰은 그 후로도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피해자가 집 안에 있다고 말했음에도 이것을 출동 경찰관에게 알리지 않는 바람에 밖에서 엉뚱한 곳을 수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안일하게 생각해서 경찰 5~6명과 순찰차 2대만 출동시켰는데, 그나마도 사건 현장을 찾은 것은 2시간이 넘은 후였습니다. 하지만 그날 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의 전말
사건이 일어난 곳은 CCTV도 부족했고 보안등이 있어도 어두운 곳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비록 사건 장소가 좁은 골목길이었지만, 오원춘의 집은 전봇대까지의 거리가 3m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이 싸이렌을 크게 울리고 적극적으로 찾았다면 살인을 포기할 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경찰은 주민들의 민원이 들어올까 봐 조용히 수색했습니다.
오원춘은 다음 날인 4월 2일에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이 오원춘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이미 곽□□는 살해당한 후였습니다. 집 안에는 여행용 가방과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컴퓨터 책상 위에는 중국술이 놓여 있었습니다. 선반에는 여자 생리대 4개가 놓여 있었고, 화장실 바닥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피해자의 시신은 무려 358 조각으로 토막난 채로 14개의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범인이 피해자를 토막낸 곳이었습니다. 끔찍한 데도 더욱 엽기적이었던 것은, 마치 발골하듯이 모든 살점을 뼈에서 깔끔하게 도려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도살업자였던 것 같았습니다.
무기징역을 받은 오원춘
오원춘은 체포 직후 자신의 범행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처음엔 성매매를 제의했었는데, 상대가 강하게 거부하자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살해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오원춘은 침착했고 밥도 잘 먹었습니다. 중국 공안과 달리 한국 경찰은 구타를 하지 않았기에 걱정하지 않으며 수사받았다고 합니다.
시신 훼손에 대해서는 시신이 생각보다 커서 잘랐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업자의 솜씨처럼 깨끗하게 뼈를 발라서 살만 모아 놓았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혹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건 대학교에 실험용으로 팔아먹으려는 것이 아니었냐는 의혹도 제기했습니다.
오원춘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는 '인육 목적'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그러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그 후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 오원춘의 근황은 경북북부제1교도소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는데, 잔혹 살인범이라서 다른 죄수들에게 구박받았다고 합니다.
112 경찰 충격과 오원춘 근황
한편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112 신고 시스템 개선, 외국인 범죄에 대한 경각심 증폭, 사회적 약자의 안전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터트리게 했습니다. 더구나 경찰이 당시 상황을 축소은폐하려고 했던 것까지 드러나면서 경찰총장이 사퇴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한국의 경찰 시스템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112 신고 시스템 개선과 현장 대응 강화 작업이 이루어졌고, 현장 출동 인력을 대폭 늘리고 CCTV 등 첨단 장비를 활용하는 시스템도 갖추어졌습니다. 오원춘 사건 현장 주변에 CCTV를 늘리고 외국인 범죄에 대한 관리 체계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여전히 경찰을 곱지 않게 봤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10여 년이 지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오원춘이 중국에 거액의 돈을 송금했던 점과 인육/장기 밀매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오원춘은 아직도 죄의식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교도소 내에서 작업이나 교육 프로그램 참여를 거부한다고 알려져서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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