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옥수 신창원 검거
원종열 형사 탈옥 사건 수사 일화
신창원 탈옥 사건 당시 최초 발견자인 원종열 경찰관은 5개월간 잠복하며 검거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상부 보고 누락 오해가 생기면서, 공적을 독차지하려고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해임되었다가 소송 끝에 복직해야 했습니다.
당시 원종열 경찰관의 숨은 공로와 그의 해임 및 복직 과정을 정리하며 설명합니다. 탈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탈옥수 신창원 검거 - 원종열 형사 탈옥 사건 수사 일화
원종열 형사와 신창원 탈옥 사건
경기경찰청의 원종열 경장은 아홉 번의 도전 끝에 경찰이 되는 꿈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997년 1월 부산교도소에서 신창원이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창원은 2개월 동안 조금씩 창살을 잘라내 탈옥한 범인으로, 단 한 명의 탈옥조차 허용하지 않던 부산교도소뿐만 아니라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했습니다.
신창원은 2년 6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며, 5000만 원의 현상금이 걸리고 총 97만 명의 경찰이 수색에 나섰습니다. 그는 907일 동안 4만km 이상을 이동하며 105회에 걸쳐 강도와 절도를 저지르고 9억 8000여만 원을 훔쳤습니다.
총력을 다했던 원종열 경찰
신창원의 탈옥 사건으로 인해 경찰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검거하지 못하자 경찰 57명이 중징계를 받아 다른 부서로 보내지게 되었고, 경찰관만 7명이 해임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신창원은 경찰의 검거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997년 6월, 제보가 들어와 당시 경기경찰청에 있던 원종열 형사가 국내에 거주 중인 신창원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신창원은 이웃을 속이며 대담하게 집들이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원종열 경장은 신창원을 잡기 위해 5개월간 잠복수사를 펼쳤습니다. 미행 중 의심을 받을까 봐 아내와 네 살배기 아들까지 차에 태우고 미행하기도 했으며,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샘 잠복을 이어갔습니다.
신출귀몰 신창원과의 대결
1997년 10월, 거처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 삼성리 한영빌라 앞에서 집으로 가던 신창원을 민간인 6명과 함께 덮쳤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후 12월, 다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평택시 신장1동 남정빌라에 숨어 있던 신창원을 민간인 7명과 함께 덮쳤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1998년 1월, 신창원이 천안시 광덕면 매당1리 산천식당 앞에 나타나자 검거하려 했으나 역시 격투 끝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원종열 경장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황에서도 신창원은 초인적인 체력을 보이며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자 언론에는 무능한 경찰이라는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더구나 원종열 형사는 더욱 억울한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당시 소재 확인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보고조차 안 한 것으로 오해받아 해임된 것입니다.
억울한 오해와 소송 고생
은신처 알고도 상급기관과의 공조 없이 무리하게 신 씨를 검거하려다 놓쳤다는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처음으로 신창원을 발견한 공은 있었지만, 혼자 검거할 욕심에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기 평택경찰서 소속 원종렬 경장 등 두 명이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신창원은 1999년 7월 16일 전남 순천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직접 잡지 못해서 더욱 아쉬운 신창옥 탈옥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억울한 원종열은 상소심까지 가는 소송을 벌여서 이겼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법원은 혼자 공적을 독차지하려고 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징계가 지나치게 무겁다고 판결했습니다. 2008년이 되어서야 복직이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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