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축구단 김용식
일제강점기 축구팀 대표 올림픽 참가 선수
축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적인 인물, 김용식의 생애와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의 배경, 일본의 올림픽 8강 진출에서의 조선인에 대한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축구단 김용식 선수는 손기정만큼 유명했던 인물입니다. 한국의 최초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그의 공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경성축구단 김용식 선수 - 일제강점기 축구팀 대표 올림픽 참가
경평축구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황해도 출신의 김용식 선수는 7세부터 축구를 시작하여, 학업보다 축구에 더 큰 열정을 보였습니다. 학교 대신 YMCA에서 교육을 이어가며, 경신고등학교 축구부에 입단했습니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인한 항일 시위에 연루되어 퇴학당한 이후, 1930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축구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축구는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축구단이 재정난으로 해체되었으나, 다시 재조직되며 김용식은 경성축구단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조직된 경성축구단에 김용식 선수가 입단하며, 손기정 선수와 맞먹는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경성축구단은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야구 선수 이영민까지 포함하여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대결은 조선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경평축구로 불리며, 남미의 광축구팬들처럼 팬들 간의 충돌까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이용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인의 대규모 집합을 막기 위해 1935년 이후 방해하며 중단시켰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축구 대표팀
이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은 선수 선발 대회를 열었습니다. 조선인 축구선수들은 일본 축구대표팀 편성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선축구협회장이었던 여운형은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선수들을 포함한 조선 대표팀을 구성하여 사실상 최정상급 국가대표팀을 만들었습니다.
일본 대표팀 선발전에서 경성축구단은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일본 지역 대표들을 6:0과 6:1의 엄청난 실력차로 물리쳤습니다. 올림픽 선수선발에서 식민지 조선 축구팀이 우승하자, 일본 정부는 규정을 변경하여 조선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방해했습니다.
일본 체육계는 갑자기 규칙을 변경서 일본 국내 대회 성적과 합산해서 선발하겠다고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경성축구단은 이 대회에서도 우승해 버리며 일제의 방해를 비웃었습니다. 대표팀의 절반 정도는 조선 축구선수가 선발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있었습니다.
올림픽의 조선인 김용식 선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7명 정도만 후보에 올렸고, 최종 명단에는 단 2명(김용식과 김영근)만 포함시켰습니다. 결국, 차별에 분노한 김영근 선수는 스스로 하차했고 김용식은 선진 축구를 배워야 한다며 베를린으로 향했고, 논란이 커지자 배종호, 현효섭, 김성간, 김용식, 이유형 등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이때 베를린으로 가는 배에서 우연히 축구 기술 책을 주운 김용식은 축구가 체력보다 기술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의 중요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영어를 배우게 한 영향 덕분에, 이미 1934년 베이징 대회에 갔을 때 영국에서 출판한 축구 지도서를 사 와서 번역을 해왔던 그였기에 영어를 읽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김용식은 일본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1차전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스웨덴을 꺾는 데 기여하며 조선 선수로서 올림픽 축구 무대를 밟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올림픽 축구에 처음 참가한 약체였습니다. 하지만 1차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스웨덴을 3:2로 누르게 됩니다.
1954년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
1승이 중요한 가운데에 벌어진 1차전은 두 골을 먼저 내주고 일본 축구팀이 위기에 처한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는 마지막에 3:2로 역전한 경기였는데, 김용식이 경기 종료 5분 20m를 단독 돌파하며 역전골 어시스트에 성공한 덕분에 이긴 것이었습니다. 조선인 덕분에 일본 축구팀은 8강에 진출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후 광복을 맞은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하여 8강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러다가 체력이 다해가며, 1952년 은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으로 참가하여 한국 축구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세월이 지나고, 그는 한국 축구의 대부로서 활동하며, 한국인 최초로 FIFA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으며,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월드컵 기념관에 흉상을 볼 수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함께 볼 심심풀이 지식거리
손기정 금메달과 일장기 말소 사건 - 안봉근 파티 일화
광복절 뜻과 의미와 해방, 독립 - 1945년 광복절과 건국절 논란
[ 경성축구단 김용식 선수 - 일제강점기 축구팀 대표 올림픽 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