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미 브라운
유럽 미술의 미라 물감
한때 문명국이라고 자랑하던 서양 유럽은 다른 한편으로는 시체를 갈아서 물감 재료로 쓰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안료인 머미 브라운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라 브라운을 사용한 유명한 그림들이 꽤 많습니다.
이 글에서, 왜 미라 물감이 생기게 되었는지, 그 재료와 사용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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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미 브라운 - 유럽 미술에서 안료로 사용된 미라 브라운 물감
머미 브라운이란 뜻
16세기 유럽 회화의 세계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물감 재료가 화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라 브라운’입니다. "머미 브라운"이라고도 불렸는데, Mummy Brown(머미 브라운)이라 뜻은 Mummy(마른 시체) Brown(갈색 피부)라는 의미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윌리엄 비치, 에드워드 번 존스, 마르틴 드롤링 등의 화가들이 이 물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미라 브라운 재료를 사용한 그림들은 광채가 나는 듯한 독특한 피부색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 특별한 갈색 안료는 실제로 미라를 으깨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질감과 색상의 깊이는 유화와 수채화 모두에 뛰어난 투명감을 제공했습니다. 화가들은 이를 음영, 피부색, 광택 표현에 사용하여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시체를 으깨 만든 물감
대항해 시대에 유럽은 전 세계를 약탈했고 그중에는 이집트도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이집트는 미라가 많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신과 수의를 방부처리하기 위해 역청을 사용했고, 16세기까지 이 역청이 포함된 이집트 미라 조직은 유럽으로 수출됐습니다.
유럽에 수출된 미라는 '약’으로 사용되며 큰 사업이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미라의 몸을 갈아서 문지르거나 음료에 섞어 삼키는 방식으로 이용했습니다. 머미 브라운은 16세기와 17세기까지 유럽의 약국에서 발견되었고, 18세기까지 여전히 응고된 혈액 약으로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16세기 유럽에는 미라 무역이라는 어두운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집트 무덤들이 약탈당하고 미라가 상품으로 유통되었습니다. 무덤들은 약탈당했고, 많은 미라들이 판매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점점 미라가 모자라지며, 1564년에는 사형수들의 시체를 사용하여 미라 조직을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미라 브라운으로 그린 그림
한편 머미 브라운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예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료였습니다. 파리에는 1712년에 'A La Momie’라는 이름의 공급 상점이 생겼으며, 이 안료는 유화 물감과 수채화 안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이르러 미라의 수가 감소하면서 미라 브라운의 사용도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색조 제조업체인 Roberson’s는 1920-30년대까지 안료를 비축했지만, 미라 공급도 줄어들고 동시에 미라 물감을 찾는 사람도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람 시신을 이용한 물감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판매가 줄어들었습니다. 당연히 더 이상 미라 재료를 사들이기 힘들어졌고 1964년에 마침내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로써 머미 브라운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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