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고려-거란 전쟁
흥화진 전투와 귀주대첩의 강감찬
흥화진 전투와 귀주대첩 등 고려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특히, 제3차 여요 전쟁의 배경과 중요 전투의 과정, 귀주대첩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과 제3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의 국제 관계까지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여요 전쟁과 대몽골 전쟁에서는 끈질겼는데, 병자호란에서는 왜 그리 쉽게 무너졌을까 하는 분석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란 단순한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깨우치는 것이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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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려거란 전쟁 정리 - 흥화진 전투와 귀주대첩의 강감찬
제2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 (1013년~)
1010년, 거란(요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과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포기하지 않고 1018년 다시 침략을 감행하며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고려는 강력한 군사력과 전략으로 거란군을 격퇴하며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1011년 정월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제2차 전쟁에서 거란이 요구한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거부했습니다. (親朝(친조)란 요나라에 가서 거란 왕에게 인사하라는 것)
고려의 배짱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1013년에는 거란과 국교를 끊고 1014년 송나라와 다시 교류를 재개하며 거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자 1018년 12월, 거란은 소배압을 지휘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략했으니, 이것이 제3차 고려-거란 전쟁입니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8년)
요나라 거란의 재침입에 대해 고려는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은 20만 대군을 모아 맞섰습니다. 흔히 고려거란 전쟁이라고 하면 귀주대첩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 전에 흥화진 전투, 내구산 전투, 마탄 전투, 금교역 전투, 연주 전투 등이 연달아 있었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군은 이미 흥화진 전투에서 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3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다시 흥화진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 강감찬은 뛰어난 전술과 병력 운용으로 거란군을 격퇴하게 만듭니다.
강감찬은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삼교천 상류의 둑을 막고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둑을 터뜨려 수공을 감행했습니다. 혼란에 빠진 거란군은 매복한 고려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군은 또다시 승리하고 말았습니다.
강감찬 장군, 강민첨 장군 (1018년 12월)
흥화진 전투에서 패배한 거란군은 개경 함락을 목표로 남하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초원의 기마부대로 전투를 해 왔기에 공성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속도전으로 진격해서 고려의 심장부를 겨누는 것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등 뒤에 고려군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평안도에서 거란군을 맞아 승리했던 고려군은 바로 추격해 왔습니다. 강민첨 대장군은 기병 1만4천 명으로 거란군을 공격하여 대패시켰고,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거란군 1만 명을 추가로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거란군은 계속 뒤쪽을 공격당하며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은 수도 개경에서 약 100리 떨어진 신은현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고려군의 청야 작전으로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워낙 단단히 방어 준비를 해 놓은 개경이었기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후퇴를 결심하는데, 이것은 귀주대첩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소배압의 실패한 직도전략 (1019년 1월)
소배압은 고려군이 끝까지 추격해 오자, 기병대 300명에게 목숨을 걸고 이를 막도록 한 후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추격한 고려군은 금교역 전투에서 목숨을 건 거란 기병대를 완전히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그 사이 거란군은 연주까지 도착했지만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에게 다시 패배하여, 귀주 방향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은 귀주대첩의 서막이 열립니다. 상원수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맞이하여 수만 명의 대군과 맞붙는 총력 대회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이때 개경에서 추격해 온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와 연주에서 합류한 강민첨의 기병부대가 나타나서 뒷쪽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강감찬의 고려 본대가 에워싸자 거란군은 완전히 포위당해 버렸습니다.
고려-거란 전쟁과 귀주대첩 (1019년 2월)
고려군의 맹공격이 쏟아지고, 순식간에 섬멸된 거란군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북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병력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소배압이 직도전략을 노렸지만, 고려의 대비가 그보다 한 위였던 것입니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결과,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현종의 굳건한 의지와 강감찬, 강민첨 등 뛰어난 장군들의 활약은 고려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러나 국제관계에서 고려가 우위에 서거나 대등해진 건 아닙니다. 거란은 전쟁으로 고려를 점령할 수 없기에 체면상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한 것이고, 고려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전의 관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에도 요나라는 계속적인 국지전을 벌였지만, 1125년 금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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