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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서울 대홍수 - 집중호우와 북한의 대남지원

키스세븐지식 2023. 10. 12.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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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서울 대홍수 - 집중호우와 북한의 대남지원 / ⓒ KBS


 

1984 서울 대홍수

집중호우와 북한의 대남지원


아웅 산 폭파사건과 집중호우 수재민, 그리고 북한의 대남 쌀 지원까지 이어지는 1983년, 1984년의 흐름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 결정적인 전환점은 1984년 서울 대홍수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대량의 수재민이 발생하자, 북한은 남한을 돕겠다며 대남 쌀 지원을 제의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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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서울 대홍수 - 집중호우와 북한의 대남지원


서울 집중호우 물난리

1984년 서울 집중호우와 홍수 / ⓒ KBS


1984년,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한국을 덮쳤습니다. 8월에 태풍 "준"이 한반도를 휩쓸고 저기압이 대량 몰려들면서, 특히 서울, 경기, 강원도에 엄청난 비를 뿌렸습니다. 1904년 중앙기상대가 생긴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20세기 들어 세 번째로 많았습니다.  


너무 많은 비 때문에 1984년 서울은 대홍수를 겪게 됩니다. 망원동과 동부이촌동 등이 물에 잠겼습니다. 특히 한강 주변 저지대는 직격탄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1, 2층이 물에 잠기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수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서울이 집중호우로 대홍수를 겪은 원인은 하수처리량 보다 많은 비였습니다. 비는 중부지방에 하루 200mm 이상 내렸고, 서울엔 298mm가 내렸습니다. 한때는 시간당 50mm가 내렸는데, 물은 모여서 흐르는 성질이 있어서, 이 정도면 매우 높은 수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대풍 준과 한강 침수

서울 대홍수와 북한의 대남지원 / ⓒ KBS


이 집중호우 이후에 1984년 북한 쌀 대남 지원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대체 얼마나 큰 피해가 있었길래 북한이 남한을 돕겠다고까지 한 것일까요? 우선, 당시 상황을 바로 알 수 있는 기사 키워드를 예로 들고, 그 다음으로 북한의 대남 지원이 왜 놀라웠는지도 설명합니다. ​


"서울, 경기, 충청 일대에 쏟아진 집중호우"

"태풍 준의 영향으로 5일간 이어진 폭우"

"위험수위를 넘은 한강"

"침수된 도로"

"예상치 못한 대홍수"

"서울 전역에 떨어진 휴교령"

"집을 떠나 대피소로 향했던 사람들"

"지붕 위에서 구호 요청을 하기도"

"구조작업에 총동원된 인력"

"그러나 결과는 역부족"

"189명 사망, 150여 명 실종"

"대규모 재신 피해 및 이재민 발생"

"열악한 배수 시설로 인해 더욱 컸을 피해 규모"

"한강 위험수위를 훌쩍 넘긴 수치"

"한강 줄기를 따라 곳곳이 물에 잠겨"

"3층 높이까지 차올랐던 물"

"주민들이 모두 나와 하수구 역류를 막으려고 하기도"

"그러나 신속히 대피하라는 대피령이 나와"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

 

 



1984 서울 대홍수와 북한 지원

1980년대 서울 홍수 태풍 준의 집중호우 / ⓒ KBS


수재민들의 고통이 심했지만, 1984년의 서울 대홍수는 의외의 남북관계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9월에 북한이 수재 복구 지원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해 온 것입니다. 북한은 1년 전인 1983년 아웅 산 폭파사건 테러를 저질렀었기에, 우리 정부도 놀란 의외의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테러 사건은 부총리와 장관까지 죽은 사건이었으므로 전쟁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1986 아시안게임, 1988 올림픽이 있었기에 전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도와주겠다고 공식 제의가 있자, 우리 정부는 어찌해야할 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부도 의외의 선택을 했습니다. 북한이 보내겠다고 한 지원품 등을 받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당시 남북한의 경제 격차는 GDP가 2배를 넘기고 있던 때였습니다. 우리가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한 제의였을 수도 있으므로, 고생 좀 하라고 일부러 받아들인 것입니다.

 

 



1984년 북한의 쌀 지원

1984년 서울 대홍수 - 북한의 대남지원 / ⓒ KBS


1984년, 북한의 트럭들이 쌀 5만 석, 옷감 50만 미터, 시멘트 10만 톤, 의약품을 싣고 한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전쟁 이후 3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은 전자시계, 오디오 카세트 등을 답례로 실어 보냈습니다. 한 번 물꼬를 트고 나자 남북관계가 확 달라졌습니다. 이어서 남북 경제회담까지 이어졌습니다.


1984 서울 대홍수는 북한의 대남 지원뿐 아니라 남북 화해모드로 연결되었습니다. 1985년 이산가족 상봉으로 온 국민을 울리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문화예술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도 논의되었습니다. 1973년 단절된 남북 대화가 다시 시작되는가도 싶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북한에 "주석님께서는..."이라는 극존칭을 써서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만약 진보 정부에서 이랬다면 빨갱이라며 또 누명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파 정권이라고 다들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간첩 사건 등이 겹치면서 더 이상 전진 못 하고 다시 냉랭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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