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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이용익의 축지법 - 대한제국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한 이용익의 돈

2022. 11. 27.

보부상 이용익의 축지법 - 대한제국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한 이용익의 돈


 

이용익

대한제국의 축지법 보부상​

 

축지법의 뜻은 땅을 끌어당겨 빨리 걷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런데, 대한제국 때 보부상 이용익은 축지법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꺼져가는 대한제국을 끝까지 지킨 사람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는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돈을 관리했을 텐데, 이용익의 돈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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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 이용익의 축지법 - 대한제국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한 이용익의 돈

 

이용익이 보부상이 된 사연

 

빠른 걸음의 보부상 출신 대신 이용익

'이용익'은 185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 왕실과 먼 친족이라고는 하나, 몰락한 양반 집안이라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자랐다고 합니다. 그가 17세가 될 때까지는 그래도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17살이 되며, 가난의 치욕으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웃집 혼례에서 가마꾼이 돼 주었다가, 이방 가마와 시비가 붙었던 것입니다. 그는 끌려가서 죽도록 맞았는데, 별거 없는 지방 관리마저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길로 아버지의 남은 재산마저 다 빼앗겼고, 결국 20살이 되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후 이용익은 보부상과 물장수를 하며 떠돌아야 했습니다. 두만강, 러시아, 연변으로 떠돌았는데, 이때 그는 엄청난 걸음 속도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용익이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가 지나면 발은 보이지 않고 옷자락만 보였다고 합니다. 

 

 


 

이용익의 축지법 걸음

 

보부상 이용익의 축지법

한편 조선은 기울어져 가고,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은 함경도 광산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금이라도 발견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굴이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집념을 가진 이용익은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달려들었습니다. 

 

몇 달씩이나 땅굴을 파던 그는 마침내 금덩어리를 발견합니다. 바로 서울로 올라간 그는 '민영익'의 집에 머물면서 광산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친해졌습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오빠입니다. 이 인연으로 그는 명성황후와 민영익의 비밀연락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연락 담당이 된 것은 당연히 보부상 시절부터 빨랐던 이용익의 축지법 걸음 때문입니다. 실제로 1882년 임오군란 때, 그는 빠른 걸음으로 한나절 만에 도착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였습니다. 그로 인해 민씨 가문의 믿음을 얻었고, 나중에는 고종의 믿음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을 끝까지 지키다

 

대한제국 고종의 비자금을 관리한 이용익

이용익은 축지법 같은 걸음뿐 아니라, 광산에 대한 지식까지 가졌기에 고종의 눈에 들었습니다. 곧이어 함경남도 광무감리 겸 병마절도사에도 올랐습니다. 금을 발견하면 고종에게 바쳐서 조선의 국고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으니, 왕실에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양반들은 그의 초고속 승진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 발언부터 천민 출신이라는 개인 모독, 무식꾼이라 관직은 안 된다는 모함까지 이어졌습니다. 또한, 그가 양반 비리는 감시하기 때문에 더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종의 믿음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황실에 충성하다 보니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백성을 압박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1888년 함경도에서 '북청민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한, 모함을 하는 등, 못된 양반의 습관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고종 비자금과 이용익의 돈

 

고려대를 설립한 이용익의 돈은 어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믿음은 더욱 높아졌고, 나중에는 비자금까지 관리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대한제국이 기울어 가며, 친일파 매국노들은 고종을 배신하고 일본에게 붙어먹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이용익은 끝까지 고종과 황실을 위한 방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1904년 일제는 그를 일본으로 강제 압송하기도 합니다. 다시 조국으로 풀려났고,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타국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907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재산은 손자 '이종호'에게 남겨졌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러나 이것이 고종의 비자금일 것이라고 본 '송병준(친일반민족행위자)'은 손자 이종호를 감금하고 포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용익의 돈은 일본 다이이치 은행 경성지점에서 돌려받지 못하고 맙니다. 한편 그는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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