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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사건 -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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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사건 -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키스세븐지식 2022. 7. 2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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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사건 -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강릉 무장공비 사건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1996년, 북한이 내려보낸 보낸 26명의 무장공비가 강릉에 침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49일 동안 사상자와 경제 손실 등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정리하고, 그 배경과 뒷이야기도 살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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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사건 -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강릉 공비 사건의 배경

 

1996년 강원도 공비 침투 사건

1968년 1.21 사태 때도 대규모 무장공비가 남파되어 충격을 주었지만, 1996년의 무장공비 사건도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당시 한국은 보수 정당과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고, 북한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1년 공산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해버리고, 1994년 김일성까지 죽어버리자 북한은 큰 위기감에 처했습니다. 이어서 권력을 잡은 김정일은 매우 호전적인 대남 전술을 진행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1996년에 일어난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입니다.

 

그해 8월에 이미 미국과 러시아가 동해와 두만강 부근에서 합동 훈련을 벌였습니다. 북한의 수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6년 9월, 원산항에서 잠수함을 출발시켰습니다. 이 잠수함에는 19명의 승조원과 무장간첩을 포함한 2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무장 간첩 침투 도발 사건

 

강릉 무장공비 사건 사살 현장

간첩들의 잠수함은 김동원 대좌와 김강훈 상좌가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인민무력부 소속으로, 해상처장이며 2중 영웅 칭호를 받고 있었으니 고위급 장교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작전이 매우 중대한 무게감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 작전 계획은 강릉 해안에 3명의 간첩을 상륙시킨 뒤, 기다렸다가 다시 태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9월 18일 새벽, 그런데 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해초가 감긴 탓에 암초에 부딪히고 좌초당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승조원들도 잠수함을 버리고 상륙해야 했습니다.

 

한편, 남한의 군에서도 수상한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황 파악을 못 하고 허둥대던 중, 한 택시 기사가 먼저 잠수함을 발견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때가 새벽 1시 30분쯤... 2시가 되자 군에서도 상황을 확정했고, 3시엔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습니다.

 

 


 

검은 돌고래로 보인 잠수함

 

1996년 강원도  무장공비 침투 지역

그러고 벌어진 내부 수색에서 각종 총기까지 발견하면서 무장공비임이 확실해졌습니다. 주변 수색도 벌어졌는데... 그날 새벽 4시에 청학산 정상에서 11명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고위급 장교이며 정찰부 서열 1위와 2위인 김동원, 김강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장공비들은 돌발상황이 발생하자 당황했습니다. 간첩들은 민첩한 작전 수행에 방해가 될 동료들을 죽이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승조원인 비전투원들은 작전 요원들에게 총살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26명의 상륙자 중 남은 13명은 군, 경찰, 예비군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그날부터 4만 명이 넘게 투입되었고, 그 후 49일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수색대가 강원도를 뒤졌습니다. 해가 뜨자 동해고속도로 굴다리 근처에서 첫 번째 공비가 사로잡혔습니다. 실탄까지 가진 무장 공비 이광수는 경찰과 격투 끝에 생포당합니다.

 

 


 

무장공비 사살과 우리측 피해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건 전사자 중 일부

이 사건은 공군 비상전력까지 대기했을 만큼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잠수함이 훈련 중에 표류한 것이라고 발뺌했습니다. 그러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서쪽으로 소양호부터 남쪽으로 용평 스키장까지 공비 출몰이 이어졌습니다. 거의 강원도 전역이 벌집을 쑤신 것처럼 된 것입니다.

 

19일, 군경은 7명을 사살하며 추격의 고삐를 당겼습니다. 그 후 22일 2명, 28일과 30일에 1명, 그리고 11월 5일에 살벌한 교전 끝에 2명을 사살하면서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머지 1명의 행방은 알 수 없었으나, 겨울로 들어서는 상황에 생존 가능성이 없어서 사건 종료가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오영안 대령, 특전사 이병희 중사 등 11명의 군인이 죽었습니다. 전시 상황이 아닌데 대령급이 사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또한 경찰, 예비군, 민간인도 6명이 죽었습니다. 이중 오인 사격 사망이 3명이나 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민간인 피해가 2천5백억 원이나 됐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공비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생포된 이광수의 실토에 의하면 김영삼 대통령을 죽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해 10월에 춘천시 전국체전에서 연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넘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후 12월, 북한은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24명의 무장공비 시신을 송환시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강릉에 침투했던 무장공비 중 2명이 살아 돌아왔다고 북한이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념 영화까지 만들어서 영웅이라며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한편, 강원도 공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생포 후 전향한 이광수는 지금도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1997년에 해군에 입대했었고, 그 후 군무원으로 근무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하게도 김대중, 노무현 시대 이후부터는 이런 대규모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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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사건 - 1996년 강원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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