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폐위 사건
태종 이방원과 양녕대군의 어리 사건
앞날이 탄탄했던 양녕대군... 폐세자된 원인과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태종과 양녕대군, 어리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래에 양녕대군과 어리의 사랑 이야기를 따로 링크 걸었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며 폐위되는 과정과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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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폐위 사건의 원인 - 태종 이방원과 양녕대군의 어리 사건
태종 이방원의 첫아들
'양녕대군'은 1394년에 태어났습니다. 조선 건국이 1392년이니, 태어나자마자 새 나라의 왕자가 되는 행운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6살 되던 1400년에 태종이 조건 제3대 국왕으로 재위에 올랐습니다.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총애를 받고 자란 후, 10살 때 양녕대군의 이름이 '이제'로 하기로 정해지며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는 삼촌인 민씨 4형제와 친했는데, 갑자기 일어난 선위 파동으로 아버지 태종이 삼촌들을 죽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후, 13세가 되어 '김한로'의 딸인 '수성부부인 김씨'와 혼인했습니다. 적어도 20살이 될 때까지, 양녕대군은 폐위라는 운명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순탄한 성장을 거쳤습니다. 태종이 자리를 비우면 대신 주요 집무를 하면서 착실하게 왕이 될 준비도 했습니다.
양녕대군과 어리의 사랑이야기
문제는, 양녕대군의 성격이 너무나 자유분방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왕세자로서의 각종 절제를 버거워했고, 사냥과 기생을 좋아했습니다. 또한 정종의 첩인 '초궁장'과 정을 통하다가 들키기도 합니다. 결국 1416년, 그에게 미녀와 사냥매를 바쳤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유배 보내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때 운명적 사랑 이야기가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양녕대군과 '어리'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사실 전 중추 '관선'의 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눈에 빠져버린 대군은 그녀와 간통을 하고 맙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 참고)
태종은 대로해서 대군을 장인인 김한로의 집으로 쫓아냈습니다. 이에 대군은 변계량의 도움으로 멩세문을 작성했습니다. 당시 최고 문장가였던 변계량의 글이라서 그런지, 태종의 마음이 움직여서 5일 만에 다시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태종 시대의 어리 사건
태종은 냉혹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이전에 미녀를 바쳤던 '구종수'와 '이오방'이라는 두 사람을 참수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비가 넘어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인 1418년, 양녕대군은 어리를 다시 불러들이고 맙니다. 이번에 더 문제가 컸습니다. 어리가 양녕의 아이를 임신했던 것입니다. 태종은 화가 폭발하여 대군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불똥은 장인에게까지 번져서 김한로가 죽산에 귀양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양녕대군 폐위 사건의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양녕도 화가 나서 항의문 같은 글을 써서 태종에게 올렸던 것입니다. 앞서 올린 맹세문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반론을 들이대는 아들에게 태종은 놀라고 말았습니다.
양녕대군 폐위의 이유
이방원이 아들에게서 받은 글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첩 하나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을 것", "이제부터는 아버지를 위해 새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일반 가정도 아니고 왕실이니, 궁궐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태종은 아들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도전했으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도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영의정 등을 불러서, 한탄하며 글을 공개했습니다.
이 정도가 되자, 신하들은 태종이 세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지난번에 원경왕후의 동생, 즉 태종의 처남들을 죽일 때처럼, 왕이 먼저 보복의 언급을 하지 않도록 신하들이 앞장서 줍니다.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세종대왕)
이렇게 해서, 양녕대군을 폐위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이 빗발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1418년의 양녕대군 폐위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때 명 정승 '황희'는 대군을 감싸다가 처벌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실록에는 태종이 통곡하다가 목이 메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양녕은 궁에서 쫓겨나 강화, 이천 등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그러나 호탕한 기질은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술과 기생들을 가까이했습니다. 양녕대군의 자녀들까지 그러고 살았으니 구설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신들은 틈만 나면 그를 탄핵하곤 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태종이 죽고 동생 충녕대군이 제4대 왕에 오른 것은 그에게 행운일 것입니다. 4대 국왕인 세종대왕은 오히려 형을 풍류객이라며 감싸고 이해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양녕대군은 시, 서예, 음악 등에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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