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선 사형이야기
조선시대의 사형 이야기
[이복선 사형 일화 - 1502년 사형집행이 미뤄진 사연, 조선 시대 사형]
이 글은 연산군 때 이복선의 사형 일화를 예로 들어 조선시대의 사형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에 가깝습니다. 20여 년째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사형수 61명이 아직 복역 중입니다.
사형제도 찬반론이 대립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사형은 마구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폭정이라던 연산군 시대에도 이복선 같은 사형 일화가 있으니, 단순히 사형이 아니라 사회 분위기와 관습 등 여러 가지 영향이 동시에 감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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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거짓 사건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44권, 연산 8년 6월 9일 기유 7번째 기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헌부에 전지하기를, 강원도 관찰사 이복선(李復善)의 ‘비가 내렸다.’는 서장(書狀)은 자기의 일을 과장하여 위에 아첨한 것이니, 국문하라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문 후 이복선은 사형 판결을 받게 되는데, 1502년 사형집행이 미뤄진 사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연을 잘 보면, 금형일, 대제사일 등 조선시대의 복잡한 사형 제도의 원칙을 알게 됩니다.
연산군 시대의 이복선이 누군가 하면, 성종 5년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대사간, 이조참의를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무오사화와도 얽혀 있는데,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사건입니다.
이런 그가 사형을 받게 된 것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후 거짓 보고를 한 때문입니다. 위에서 "과장하여 비가 내렸다"는 서장을 올렸다고 국문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에 농사가 잘되고 태평성대를 누린다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사형 집행과 금형일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강원도에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하고 아녀자를 희롱했으며 공금을 횡령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알고 보니 이런 악행이 드러났음에도 자신이 잘 다스리고 있다고 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탄핵을 받았고, 사형이 판결되었습니다. 봄, 여름은 농경 국가의 중요한 농사가 있는 계절이니 10월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되어 사형하려고 보니 '금형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형일'이란, 절기가 되는 날에는 '"명진재일"이라고 하여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춘분과 추분 사이, 매월 1, 8, 14, 15, 18, 21일에는 사형을 미루었던 것입니다. 이날은 하늘의 재상이 지상을 둘러보러 오는 날이기 때문에 살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산군 10년 이복선의 사형 집행은 미뤄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사형은 금형일을 피해서 다시 정해졌는데...
이복선의 사형집행은 이루어질까
이제 두 번째로 이복선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질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왕의 생일이면서 중전의 생일날이었습니다. 왕과 중전의 생일이 겹치는 우연이 쉽지 않은데, 왕실의 출생, 사망, 기념일이 되었으니 또 한 번 사형집행이 미뤄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형 집행일을 잡고,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복선이 사형은 미뤄지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좌의정이 죽어 국가적 초상날이었으니 역시 사형을 집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다시 사형집행일을 잡았고, 죽다가 살아난 이복선은 또 그날까지 피 말리는 기분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사형이 미뤄진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도대체 왜 안 죽이는지 사형수 스스로가 더 궁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가 너무 와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죽이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기에 연기되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망나니가 사형을 집행할 때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사건을 빌미 삼아 겁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죽기만도 못하는 삶
목이 날아갈 날이 다가오면 잠도 오지 않을 것이고 먹는 거도 소화가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짓을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을 반복하니 사형수 스스로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복선은 사형이 미뤄지다가 실제로 사형집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공포감 때문에 화병이 나서 감옥에서 옥사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죽일 듯하면서 죽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모든 경우가 위와 같다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역죄인은 신속하게 무조건 빨리 죽였을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를 통해서 조선시대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을 다 고려해가며 형을 집행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 백성과 지배자의 관계를 헤아리는 전통과 조선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역사 일화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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