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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금서 - 정조의 패관잡기, 패관문학 역사이야기

키스세븐지식 2019. 4. 1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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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금서 - 정조의 패관잡기, 패관문학 역사이야기] 


조선 후기를 꽃피운 영정조 시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었지만 흐트러지지 않고 옳은 정치를 해낸 왕입니다. 그런데 이때 문체반정이라고 금서를 정한 사건이 있었으니, 개혁진보 정치를 하던 정조의 보수 정책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사의 뒷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조의 패관문학, 패관잡기 역사이야기를 통해 천주교와 실학사상 시대의 배경을 설명합니다. 






정조, 패관소설 문체를 금서로 하다 


조선 '정조'는 진보적인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는데, 과거로 돌아가자며 단속을 했다고 하니 좀 의외의 역사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사소한 문체를 가지고 규제를 했으니 말입니다. 흔히 이것을 정조의 '문체반정'이라고 부릅니다. 

文體反正(문체반정)이란 글의 문체를 바르게 하겠다던 1792년 정조의 정책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비변문체'나 '귀정'이란 말로 불렀습니다. 즉 옛날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며, 정조가 '패관문학(패관잡기)' 문체를 고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진: 정조의 초상. 개혁군주이며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정조의 초상. 개혁군주이며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 금서 정조 패관잡기 패관문학] / ⓒ Unknown)


그렇다면 왜 정조는 패관잡기 문체를 고치려고 했을까요? 패관문학이란 떠도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적은 글을 말합니다. 옛날 중국 한나라에는 '패관'이라는 관직이 있었습니다. 패관은 궁궐 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관직입니다. 

패관잡기 어원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는데, '어숙권'이란 사람은 여러 일화를 모아서 <패관잡기>란 책을 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다 보니 정식 공문서와 다른 문체가 생겼던 것입니다. 패관소설은 정식 소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패관잡기 문체가 유행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행색이 마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아는 것 같다"라는 문장을 공문서 형식으로 쓴다면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한 사람이다"라는 건조한 문체가 될 것입니다. 읽는 재미는 있으나 핵심만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말장난을 치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SNS에서 오가는 말을 보면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정조도 이런 문체가 자꾸 올라오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릅니다. 유교가 왕의 도리라는 관념이 지배했던 시대였으니 말입니다. 


사진: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의 초상. 그의 글을 정조는 패관잡기 문체라 했다(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의 초상. 그의 글을 정조는 패관잡기 문체라 했다 [금서 정조 문체반정 패관문학 패관잡기] / ⓒ Park Ju-su)


특히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때 패관문학이 유행했습니다. 중국 본토의 한족들이 북방민족에게 점령당하면서 마음이 혼란했기 때문에 유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의 문체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조가 금서의 대상으로 한 것이 그런 종류입니다. 

이런 책들이 자꾸 수입되자, 정조는 '패관소설'들을 잡서라 하여 금서로 정했고, 이것이 정조의 문체반정이 됩니다. 권력을 잡은 청나라에 반항하는 민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절대복종이라는 봉건체제에도 방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박지원'의 <허생전>, <양반전>도 몰래 나라를 세우거나 양반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정조, 문체 반정의 진실 


조선 정조대왕은 '이상황', '김조순' 등이 중국 패관소설인 <평상냉연>을 읽는 것을 발견하고는 책을 불태웠습니다. 그렇다고 '사화'처럼 엄청난 보복이 가해진 건 아니고, 패관잡기 문체를 사용하면 반성문을 쓰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정조는 문체반정을 지시했을까요? 단순히 옛날 문체가 좋다는 유교적 고집 때문이었을까요? 패관문학 논란에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전래의 시대 배경이 얽혀 있습니다. 처음엔 노론이 먼저 남인을 공격했습니다. '이가환'의 글이 패관문학체라고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보수적인 '노론'세력은 진보적인 '남인'세력을 제거하려고 모략질을 했습니다.


사진: 패관문학으로 지목을 받은 박지원의 열하일기(패관문학으로 지목을 받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문체반정 금서 정조 패관잡기 패관문학] / ⓒ Jocelyndurrey)


남인이었던 '이승훈', 이가환 등이 서양사상을 공부하자 유교만을 진리라고 고집부리던 노론이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뜬금없게도 정조는 문체반정을 들고 나왔습니다. 서양학을 배격하려면 서양학을 받아들인 청나라 초기의 패관소설을 금서로 해야 하고, 그러기에 패관잡기 문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론의 편을 들어주는 모양새이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정조가 패관문학을 반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학을 주장하는 남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조는 이가환이 아니라 박지원을 문제 삼았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당시에 큰 인기였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문체반정이란 것에 적발된 사람들은 대부분 노론파였습니다. 보수를 지키자는 정당에서 비리사건이 더 많은 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은가 봅니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입니다. 이상황, 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등이 모두 노론세력이었습니다. "너네들은 더 심하지 않느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정조의 불편한 심기 때문에 감히 남인을 제거하라고 주장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고집이 대단했습니다. 박지원은 죄가 너무 커서 반성문을 못 쓰겠다고 은근히 반항을 했고, 장원급제를 했지만 정조가 패관잡기 문체를 문제 삼아 꼴등으로 처리하자 '이옥'은 차라리 벼슬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조선 천주교에 공헌을 한 청나라 주문모 신부(조선 천주교에 공헌을 한 청나라 주문모 신부 [금서 정조 문체반정 패관문학 패관잡기] / ⓒ Republic of Korea)


정조가 패관소설과 패관잡기 문학을 문제 삼아서 실학자와 남인을 보호해 주었지만, 노론은 집요하고도 끈질겼습니다. 결국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선교를 위해 밀입국한 사건을 빌미로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이 유배 가거나 좌천되었습니다. 그리고 1800년에 정조가 죽은 후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 피비린내 나는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정조가 패관소설과 패관잡기 문체로 문체반정을 한 것은 절묘한 신의 한 수였지만, 세상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더 많았으니 조선이 망한 것은 이때부터 정해진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살아남으려면 변화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역사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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