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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워털루 전투 - 워털루 이빨, 틀니를 위한 시신 상해사건

2019. 5. 3.

[워털루 전투 - 워털루 이빨, 틀니를 위한 시신 상해사건] 


흔히 오복 중 하나가 이빨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많은 수가 치통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 나폴레옹의 몰락 전투로 알려진 워털루 전투는 "워털루 이빨" 절도 사건으로도 유명한 전투입니다. 죽어서도 신체 절도를 당해야 했던 비극이 있어서입니다. 워털루 전투와 틀니 사건을 들여다보면 인류의 치과 기술이 근세 시대에는 어땠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 전쟁 속에서 죽어간 젊은 이들이 바친 것은 피 외에도 이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는 1815년 벨기에의 워털루라는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워털루 전쟁이 중요한 역사인 이유는 유럽을 통일시킬 기세였던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서 진 후, 유럽이 약 100년 간 평화를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뒤편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워털루 전투와 틀니 이야기입니다. 전투 이후 유럽에서는 "워털루 이빨"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사진: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했던 벨기에의 워털루 전쟁 그림(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했던 벨기에의 워털루 전쟁 그림 [워털루 이빨 워털루 전투 워털루 틀니] / ⓒ William Sadler)



유럽 역사에서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 가장 강력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빠르고 강했으며 나폴레옹의 전략은 이전에 볼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상대가 힘을 합치기 전에 각각 격파해버리는 그의 전술 때문에 상대는 더 많은 병사를 가지고도 항상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워털루 이빨의 일화가 생긴 것은 나폴레옹이 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수만 명이 시체가 생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10만여 명과 프로이센(독일)군 4만 5천여 명, 영국과 네덜란드군 약 7만 명이었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벌인 워털루 전투에서 5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더 끔찍한 일이 닥쳤습니다. 이들의 이를 뽑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는 아직 살아있는 병사의 이도 뽑아갔다고 합니다. 



사진: 병사들은 죽거나 다친 후 이를 뽑히기도 했다(병사들은 죽거나 다친 후 이를 뽑히기도 했다 [워털루 이빨 워털루 틀니 워털루 전투] / ⓒ Dennis Jarvis)



이들은 죽은 병사의 물건을 훔치기 위해 몰려든 주변 사람들과 전문 신체 절도범들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너무 가난해서 병사들의 옷과 식량으로 버티려고 나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중에는 오직 돈을 위해 함부로 시신의 이를 뽑아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시신 훼손을 통해 한동안 유럽 틀니 시장의 기둥이 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워털루 이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 부상병의 이까지 뽑아간 만행입니다. 





워털루 이빨 틀니 


인간은 잡식 동물이고 당분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특히나 이가 잘 상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등은 틀니로 유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틀니는 대부분 20세기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코끼리 상아를 깎아서 만든 이빨이 처음 나온 것이 17세기이니, 그 이전에는 사람의 이를 가지고 틀니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워털루 전쟁에서 워털루 이빨이 나돌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진: 엘리자베스1세 여왕, 조지 워싱턴 등도 틀니를 했다(엘리자베스1세 여왕, 조지 워싱턴 등도 틀니를 했다 [워털루 이빨 워털루 전투 워털루 틀니] / ⓒ LionFive / www.kiss7.kr 편집)



그러나 그것도 부자나 가능한 일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서 입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틀니처럼 잘 고정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자유롭게 음식을 씹지 못하기 때문에 미용 제품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틀니는 부자들의 사치품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생니를 뽑아서 빵을 사 먹기도 했습니다. 부유층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 사형수의 이가 뽑히기도 하고 워털루 이빨처럼 시신의 치아가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와 미국 남북전쟁 등에서 매우 많은 병사가 죽었으므로 시신 이빨로 돈을 버는 신체 절도범 입장에서는 금광을 만난 것과 같은 경우였습니다. 파리에서 3백 킬로 밖에 안 되는 거리에 몇 만 명의 치아가 널려 있으니 기뻐서 손뼉을 쳤을 것입니다. 

또한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며 젊은 이들을 죽음으로 보낸 권력자들은 그들의 시체마저도 사치를 위해 소비했다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치아 시장은 엄청난 활황기를 맞았고 워털루 이빨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근데 인공치아 틀니의 모습. 억지로 고정했다(근데 인공치아 틀니의 모습. 억지로 고정했다 [워털루 전투 워털루 이빨 워털루 틀니] / ⓒ enfermeriabuenosaires.com)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도 딸의 약값을 위해서 생니를 뽑는 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니 2개를 뽑고 받은 돈은 겨우 20프랑이었습니다. 

18세기에 인공치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생겨도 이런 짓은 계속 되었습니다. 19세기 워털루 이빨도 아직 이런 짓이 계속될 때의 이야기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저렴한 재료가 개발되어 서민층도 의치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만 권력층 대신 치과의사들의 배가 부르는 시대로 달라졌을 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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