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 정신, 채이항 - 돈키호테 같은 강직함]
입으로는 국가를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 일이 터지면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선비 정신을 몸소 실천한 채이항은 조선의 돈키호테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 평가는 막무가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념을 꺾지 않는 의지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병자호란 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리고 청나라에 끌려갈 때까지의 행적은 간 큰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조선의 선비 정신 채이항
조선 중기는 외적의 침입과 혼란한 국내 정치로 백성들의 신음이 하늘을 찌르던 때입니다. 조선 14대 왕 '선조'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고통스러워진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지기도 전인 1623년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역사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의 인물이 '채이항'입니다.
(남한산성 안내비 [조선의 선비정신 채이항] / ⓒ Nosu)
조선 선비정신의 인물 채이항은 1596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은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집안 누구도 급제를 하지 못하여 정치에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오봉선생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을 뒷산에 '오봉정사'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을 가르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꼬장꼬장한 성격을 가졌으며 옳지 않은 일을 보면 참지 않고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소설 <인간의 힘>으로 출판이 된 적도 있습니다. 채이항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도 왕을 구하기 위해서 출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도 30여 명의 장정들과 힘을 합하여 왕을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모두 전사하고 그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인조는 청나라 왕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왕을 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태였습니다.
(남한산성 설명도 [채이항 조선의 선비정신] / ⓒ Singgre)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병자호란 후 그의 상소내용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인조에게 대놓고 "무단"이 부족하다고 하며 인재가 없고 붕당정치를 하며, 폐단이 여전하고 조선이 신의를 잃었다고 올린 것입니다. 인조는 기분이 나빴겠지만 모두 옳은 소리이며 충성심이 구구절절 맺힌 상소였기에 뜻을 새겨 실천하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채이항은 조선의 돈키호테
병자호란까지의 채이항의 삶은 수많은 의병 중의 하나였을 뿐이지만, 그를 조선의 돈키호테라고 부르게 된 사건은 인조 18년(1640년)의 일이었습니다. 의주에서 청나라 사진의 난리를 친 사건과 관련해서, 아직도 명나라에 충절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고 '신득연'이 일러바쳤다고 합니다. 당연히 청나라는 발끈하여 그들을 잡아서 청나라로 보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유럽 돈키호테와는 다른 형태의 채이항 [조선의 선비정신 채이항] / ⓒ Dave Winer)
조선은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척화파로 알려진 '김상헌', '조한영', 그리고 채이항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채이항은 벼슬도 없이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매우 특이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도망가라고 했지만 그는 스스로 임금 앞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올렸습니다. 인조는 살길이 있다면 목숨을 바치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고 몰래 말렸지만 돈키호테같은 채이항의 결심은 꼿꼿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일깨우는 개기가 된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합니다. 중국 심양으로 끌려간 그는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견뎌내고 2년 여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죽으라고 보낸 자가 살아 돌아왔으니, 급제를 못한 자였어도 지방 벼슬을 하사 받았고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안내 박물관 내부 사진 [채이항 조선의 선비정신] / ⓒ Jocelyndurrey)
사실 조선의 고난은 지나치게 보수화되어 국제정세의 탄력성이 떨어진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채이항 같이 꼬장꼬장한 고집은 국가 입장에서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치인들을 보면 입으로만 떠들면서 희생은 하지 않는 모습이 많습니다. 그럼 면에서, 채이항의 의의는 신념을 실천하고 모범을 보이려고 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범을 보이는 자만이 옳고 그름을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