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오대양 사건 - 박순자, 유병언, 구원파 등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정리]
1987년 교주 박순자 등 신도 32명이 집단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의해 벌어진 이 사건은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으로 불리며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한편 세월호 사건도 얽혀 욕을 먹었던 유병언은 이 사건에도 얽혀든 적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인생 참 힘들게 산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사 미스터리 중 하나였던 오대양 사건을 정리하고 그때 인물들의 그 후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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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교주 박순자
먼저 박순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둬야 하겠습니다. 그녀는 한때 병을 앓았었는데, 병이 회복되자 이것이 신의 구원 때문이라고 믿고 종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구원파라는 교파에 들어가더니,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탈해서 '오대양'파를 만들었습니다.
오대양이란 뜻의 유래는 박순자가 스스로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이며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 후 그녀는 교명을 오대양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또한 회사를 세웠으며 사회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84년 대전시 중구 가수원동에서 설립된 오대양 주식회사는 계속 확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녀가 하던 사회사업은 유치원, 양로원, 고아원 사업이었다고 하고, 경제 사업은 수입품 판매장을 열어 수입하더니 공장을 사들여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일본의 업체와 합작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수억의 피해를 보며 사업에 실패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사채가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감당 못 할 처지에 이른 것입니다.
오대양 사건의 시작
한편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녀는 신도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종교 집회를 했다고도 합니다. 부부에게 각방을 쓰게 하고 외출도 엄격히 통제했으며, 반성의 시간이란 것을 열어 규율을 어긴 사람은 다른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게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어머니가 잘못하자 딸이 어머니를 패고, 이에 어머니가 감사하다고 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계속 빚에 허덕이던 오대양 교주 박순자는 신도들을 독촉하여 사채를 더 끌어오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돈이 170억 원... 그러나 빌려온 사채로 다른 사채를 막는 식의 해결책 없는 방법이 계속되어, 마침내 1987년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으로 터지고 맙니다.
돈을 빌려둔 사람들이 원금을 받으러 갔다가 신도들에게 오히려 집단 구타를 당하자 이를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면서 급물살을 타게 되었습니다.
1987년, 이 일로 인해 경찰서에 출두한 박순자는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기절해서 아들과 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이튿날 그녀는 병원을 빠져나가더니 회사 직원과 육아원 아이들 등 130명을 데리고 잠적해버렸습니다.
이후 3백여 명이 80억 원을 빌려줬는데 못 받는다고 신고를 했고, 오대양 사건은 폭행 사건에서 거액 사기 사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그런데 현장을 수색한 경찰은 이 사건이 이상했습니다. 용인공장에 신도들이 49명이나 은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이송한 경찰은 가족들에게 인계했지만, 찾을 목적이던 박순자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직원이었던 한 사람이 공장 식당 쪽 천장이 이상하게 내려앉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그곳에서 박순자를 비롯한 총 32명의 주검이 발견됩니다.
천장은 금방이라도 꺼져 내릴 것 같은 석고보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면적도 겨우 4평(13제곱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 어린아이 10명을 포함한 32명의 남녀가 4일간이나 숨어 지낸 것이었습니다.
주검들이 2~3겹으로 쌓여 있는 지옥 같은 현장에서 마침내 오대양 교주 박순자와 그의 아들, 그리고 공장장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 졸려 죽어 있었습니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박순자가 공장장에게 자신을 목 졸라 죽이라고 시킨 뒤 사람들에게 서로 목 졸라 죽이도록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후 마지막으로 두 아들과 공장장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 직원 11명의 행방이 묘연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증거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경찰은 이들을 긴급 수배했지만 당시에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오대양 사건 수사
그 후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은 전국을 공포에 몰아넣으며 미스터리에 빠졌습니다. 당시의 5공 정부와 관련설부터 5공 덕분에 급성장한 유병우의 회사 삼우트레이딩과의 연관설, 구원파의 배후설 등 끊임없는 의혹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문제가 심했던 것이, 당시 언론들이 검증 없이 무차별적으로 무조건 터트리고 보는 행동을 하며 미스터리를 더 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991년, 사라졌던 수배 직원들이 자수하면서 오대양 사건은 재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6명이 자수했는데, 일부가 없었던 것은 자살 사건이 터지기 전에 반성의 시간이란 것을 하면서 구타당해 몇 명이 이미 죽었었기 때문입니다. 사망한 그들은 직원들에 의해 살해된 뒤 암매장되어 있었습니다.
미스터리로 남았던 것은 목 졸라 죽일 당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 등을 먹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죽었다는 것, 남자들이 성폭행한 후 죽였다는 것, 외부에서 타살당한 후 이곳으로 옮겨져서 자살로 위장되었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밀 조사에 의해 성폭행과 외부 타살설은 사실이 아니었고,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은 사이비 종교에 의한 광적인 행동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대양과 유병언 등의 의혹
한편 이들이 죽은 후 여러 메모가 발견되었다는데, 거기에 "삼우도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는 메모가 논란으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삼우란 유병언이 설립한 삼우트레이딩이 아닌가 하는 것이 논란의 핵심입니다.
실제로 삼우와 거래한 흔적도 있고 유병언은 구원파 관련 인물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질타가 유병언에게 몰아쳤습니다. 이것은 구원파의 배후설과 유병언 실제 교주설 등이 되어 일파만파 퍼졌습니다.
하지만 실제 조사 결과 유병언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병언은 오대양 사건과는 관계없는 별건 수사에 의해 구속되었습니다. 혐의는 사업에 관련된 상습사기 혐의입니다.
별건 수사란, A라는 사건 중에 B라는 범죄 혐의를 발견하여 또 다른 수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무조건 잡아넣기 위해 오대양과 관련 없는 사건을 조사해서 구속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중에 2014년 유병언의 세월호 사건 또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세월호 운영사인 청해진해운의 실 소유주가 유병언이었다는 국민적 질타가 몰아치며, 또 구속당할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역시 나중에 밝혀지지만, 나름의 잘못이 있긴 했어도 청해진해운의 직접적 운영은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대양 사건에 이어 세월호 사건까지 얽힌 유병언도 참 기구한 인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그는 2014년 노숙자 차림으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DNA 조사에 의해 본인 확인이 되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온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87년, 1989년, 1991년까지 세 번이나 재조사가 있었으니 드러날 만큼은 다 드러난 사건이며 더 이상은 미스터리로 부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배후설과 타살설, 유병언 관련설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32명이 서로 목 졸라 집단 자살을 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큰 혼란기였던 20세기 말의 현대사에서 말하기 싫은 비극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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