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 사건 - 전태일 3법은?]
전태일 3법이 추진 중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를 한 지 50년이나 지난 후입니다. 지금도 1600도가 넘는 용광로에 노동자가 빠져 죽고, 비정규직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죽어도, 안전장치를 하는 것보다 벌금이 더 싸기 때문에 방치하는 기업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주요 산업국 중 산업 재해율이 22위, 산재사망율은 1위입니다. 사망률이 이렇게 높은데도 재해율이 낮은 것은 웬만한 사고는 신고도 하지 않고 노동자가 자기 돈으로 치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한 50년의 세월, 세계 경제 GDP 순위 9위인 한국의 현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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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분신 사건 정리
눈부신 경제성장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한국의 1970년대, 당시 노동자는 하루 14시간을 일하고 일요일마저 격주로 해서 한 달에 2번 쉴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근로기준법이 있었습니다. 근로자는 주당 48시간, 최대 60시간 이상의 혹사를 시키면 안되고 1주일에 1회 이상 유급휴가(휴일)를 주도록 했지만...
그러나 기업들이 돈을 벌어 재벌이 되는 동안 이 법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 정부도 기업 편을 들어 주고 있었으니 노동자는 하소연할 데도 없었습니다. 현대에도 주 50시간 근무와 최저임금제를 시행할 때 재계와 보수정당, 보수언론의 비난과 저항이 거셌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기름을 뿌린 후 몸에 불을 붙인 채 서울 평화시장을 뛰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를 외쳤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전태일은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치료 비용이 필요했지만 당시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며 돈 없는 노동자를 그냥 방치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방치되던 그는 결국 밤 10시에 죽고 말았습니다.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가난
1948년에 태어난 전태일은 어릴 때부터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부모가 다 노동자였는데, 서울에서는 가족 전체가 노숙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갈 수 없어서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행상 판매를 하며 돈을 벌어와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학교도 강제로 그만두게 하고 재봉틀 일만 지키며 폭행했습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가출입니다. 당시 의류 봉제업이 한창이던 서울 청계천으로 온 그는 수습공으로 들어가서 14시간을 일하고 하루 50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돈으로 쳐도 라면 3개밖에 못 사는 돈입니다.
그럼에도 기술을 배운다는 것에 감사하며 일을 했고 재봉사도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는 가혹한 노동환경 때문에 폐렴에 걸린 노동자를 사업주가 강제 해고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전태일이 분신할 때 자신이 외칠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때입니다.
한편으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서 책을 사서 공부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고 돈을 모아서 겨우 책을 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눈을 뜨게 된 근로기준법.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전태일 열사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바보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착취당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 바보회의 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진 자 뿐만 아니라 같은 노동자들도 그를 비웃었습니다. 지금도 친재벌 정책을 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가난한 노동자가 많은데, 이런 아이러니는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노동청에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서한도 보냈지만 모두 묵살당했습니다. 언론에도 권리 청원을 보냈지만 몇몇 진보적 언론 이외의 보수언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전태일 열사는 스스로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을 열었습니다.
전태일 분신자살의 그날
이렇게 열띤 노력을 한 끝에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하게 되었지만, 사업주 편에 든 정부가 약속을 위반해서 실패했습니다. 지금도 개혁을 하자고 하면 욕을 먹지만, 자본가와 보수언론, 보수 정치인들은 그들은 사회주의 빨갱이라고 헐뜯으며 공격했습니다. 50년이 지났어도 지금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입니다.
노동청에서마저 법을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깨버리자 그는 동료들에게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의 화형식을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모인 1970년 11월 13일의 시위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저 근로기준법 하나 지켜 달라는 시위였지만 플래카드를 빼앗기고 경찰까지 방해했습니다. 잠시 골목에 있던 그는 몸에 석유와 휘발유를 붓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라이터를 켜 달라는 전태일. 그 사람은 전날 쇼라도 해야겠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런 줄 알고 불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쇼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온몸에 불이 번지고, 그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가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처음 봤기에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혼자서 그렇게 타들어 가다가 마침내 쓰러진 사건입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그 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후 병원으로 옮겨졌고 어머니가 뛰어왔습니다. 의사는 15000원짜리 주사 두 대를 맞으면 일단 화기는 가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기에 마침 따라와 있던 시청 근로감독관에게 보증을 부탁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위해 나중에라도 갚겠다고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의사는 그 약마저 현재 병원에 없다며 다른 병원에 가 보라고 해서 갔다가 서너 시간 방치되었고, 또다시 옮겼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마침내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 남긴 말을 "배고프다"였다고 합니다.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항거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끔찍한 죽음도 충격이었지만, 당연한 듯 착취당하던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습니다. 전태일의 말처럼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억압당하고 살아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용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폐병에 걸려서 다른 데에 취업하지 못하자 홧김에 그랬다고 가짜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물론 아무 생각 없는 어떤 노동자들은 그게 사실인 줄 알고 또 당연한 듯 계속 착취당했습니다.
전태일 3법이 추진되기까지
보수 정당에서는 그저 골치 아프게 됐다는 반응이었지만 진보 정당에서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노동문제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학생 운동 집회에서도 본격적으로 노동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도 노동운동을 지지했고, 신민당(구. 더불어민주당 계보)의 '김대중'도 전태일 정신을 위한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으로 인한 끔찍한 죽음을 맞을 때, 끝까지 함께 했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과의 약속대로 노동운동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여동생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나중에 민주통합당(구. 더불어민주당 계보)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이때 결성되었습니다. 다른 공장들로도 노동조합 결성이 물결처럼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태일 3법이 추진 중입니다.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이 추진한 "기업살인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5인 미만 노동자도 보호하는 것, 특수고용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전태일 3법입니다.
이에 조중동 보수 언론에서는 "이런 나라서 기업하는 사람들 애국자라 할 수밖에"라는 사설 등에서 노동자만 편드는 진보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은 노동운동 기사를 낼 때마다 앞에 "강성 노조"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들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노조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2020년 현재에도 근로기준법의 적용이 되지 않는 노동자가 전체의 20%가 넘습니다. 이들은 5인 미만 사업체의 노동자이거나 특수고용직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전태일 3법입니다.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이 있은 후 50년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비정규직이라서 일하다가 죽어도 보상도 해 줄 수 없다는 기업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원했습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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