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분출 - 백두산 화산폭발 역사 2]
이 글은 과연 발해 멸망이 백두산 폭발 때문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백두산 화산폭발 역사 1편에서 기존의 역사 연대와 과학적 연대의 차이의 문제점을 다루었습니다. 즉 연대에 맞춰 발해 멸망을 볼 것이 아니라 사건에 맞춰 연대를 보면 어떨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연도가 중요하니 연도를 관심 있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거란 역사책 요사의 연대와 백두산 화산폭발의 측정 연대의 미스터리를 추측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번에는 발해가 멸망한 시점을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주제로 글을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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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과 백두산 폭발의 미스터리
학자들은 발해 멸망이 926년이었고 백두산 폭발이 946년에 있었으니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정하지만, 926년의 근거가 되는 요사의 기록에 대한 의심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거란의 요사는 1344년 원나라 때 만들어졌습니다. 거란의 '요나라'가 멸망한 후 200년이나 지나고, 발해가 멸망한 후 400년이나 지난 시점입니다. 역사서를 의심하면 근거가 복잡해지지만, 역사를 적는 사람의 실수는 의심할 수 있는 일이니 아직도 발해와 화산 폭발 연관성이 존재하게 됩니다.
(선비, 말갈, 거란, 신라, 발해 영토 지도 [발해 멸망 백두산 화산 분출 폭발 역사] / ⓒ www.kiss7.kr)
만약, 실제 폭발이 946년에 있었고 그 이전부터 이미 발해 지역에 이상기온이 덮쳐서 멸망하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실질적인 발해의 멸망을 940년대로 보면, 애초에 요사에 적힌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는 표현과 너무나도 딱 맞아떨어집니다.
실제로 926년경의 퇴적물을 보면 한랭지역에서는 사는 규조류가 나오고 있습니다. 화산 폭발 이전부터 전조증상으로 이상기온이 덮치고 흉작이 이어져서 망하고 있던 차에, 거란이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946년의 백두산 화산 폭발 역사는 매우 무시무시합니다. 화산 불기둥이 25km나 치솟고 500도~700도의 '화산쇄설류'가 쏟아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화산쇄설류란 뜻은 화산 분출물과 돌덩어리들이 고속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시속 150km로 날아다녔을 것입니다.
천지의 물과 눈은 녹아서 해일이 되어 마을을 덮쳤을 것이고, 화산재는 초속 120m로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까지 겨우 3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속도입니다.
(백두산 눈이 화산폭발로 녹으면 해일, 홍수가 된다 [발해 멸망 백두산 화산 분출 폭발 역사] / ⓒ lbf523)
백두산 분출은 한반도 전체를 45cm 두께로 뒤덮을 양이었고, 남한을 대상으로 본다면 1m 두께로 화산재를 덮을 양입니다. 이것은 서기 79년 도시를 파묻어 버렸던 폼페이의 '베수비오' 화산폭발의 100배나 되는 것이며, 2010년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랴요쿨' 대폭발의 1천 배나 되는 규모입니다.
아무리 발해와 백두산의 관계를 "도시전설" 수준으로 떨구어 생각한다고 해도 무시무시한 화산폭발 역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발해가 15일 만에 내분으로 갑자기 망했다는 것보다는 이것이 더 와 닿습니다.
(폼페이 화산폭발 때 파묻혀 죽은 사람들 유적 [발해 멸망 백두산 화산 분출 폭발 역사] / ⓒ Alamy)
발해가 멸망한 후
그 후 927년부터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발해 백성이 고려로 넘어옵니다. 특히 고려시대 기록에서 934년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과 고려에 투항했다는 기록은 인상적입니다. 고려는 대광현에게 발해 왕실의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이것은 발해 왕조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재해로 고향을 떠나 온 그들의 설움을 불쌍히 여겼을 수도 있지만, 더불어 두 가지 가설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하나는 926년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흡수한 것이냐이고, 또 하나는 아직 멸망하지 않은 발해지역이 이상 기온으로 황폐화돼서 유민이 생긴 것이냐입니다.
(북서풍에 의한 백두산 폭발의 영향 지역 [발해 멸망 백두산 화산 분출 폭발 역사] / ⓒ seokjihyang)
926년 완전히 발해가 멸망했다고 주장한다면 그저 전쟁에 패한 유민일 뿐이고, 그 후에도 후발해라는 나라가 계속 존재했다고 주장한다면 거란 때문이 아니라 백두산 때문에 유민이 발생한 것이겠습니다.
또 발해 역사를 살펴보면 938년에 쿠데타가 있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설도 보게 됩니다. 이때의 나라가 '정안국'입니다. 즉, 발해가 망한 후 거란이 동란국을 세웠고, 동란국이 서쪽으로 옮길 때 후발해가 있었으며, 후발해가 다시 정안국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입니다.
정안국의 정권교체 때문에 발해의 밀려난 세력이 고려로 투항했다고 본다면 내분에 의한 멸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것은 후발해를 인정해야 하고 거란의 침략이 실패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가능한 얘기입니다. 즉, 발해 역사 자체가 혼란이며 백두산 화산폭발 역사 자체가 미스터리인 것입니다.
정안국은 986년까지 남아서 버텼지만 예상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역시 백두산 지역을 살짝 비켜서 영토를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발해 멸망 후 동란국, 후발해, 정안국 영토 지도 [발해 멸망 백두산 화산 분출 폭발 역사] / ⓒ www.kiss7.kr)
지금까지 발해와 백두산 화살폭발 역사에 대해서 인정되지 않은 여러 가지 가설과 인정된 역사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가상 역사를 증오하는 사람이 본다면 가설은 단지 소설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나 과학은 원래 수많은 가설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을 사실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서 또 다른 증거가 발견된다면 "사실"이 또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설 혐오증은 역사나 과학의 발전을 막는 방해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자본과 시간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있지만...
[발해 멸망과 백두산 화산 분출 - 백두산 화산폭발 역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