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숙녀 사건 - 한 며느리의 주술 복수]
조선은 유교국가지만, 불교를 믿었고 토속신앙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실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주술을 했다는 기록이 꽤 많이 나옵니다. 장희빈의 저주 등 9건 이상이 실록에도 등장합니다. 병자호란 당시의 왕 인조실록에도 주술에 얽힌 사건이 나옵니다. 하지만 법을 어떻게 집행하고 재판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선시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죄가 사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그리고 그 증거가 증명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우리 조상은 어떻게 판결하려고 했는지 되돌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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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녀 사건의 주술
'인조실록'에 보면,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죽였다는 고발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죽이는 방법이 주술이었다고 해서 난감한 상황이 됩니다. 그러자 한 간원이 인조에게 무고로 고발한 것은 다른 백성들의 피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무고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간언 하는 내용이 인조실록에 나옵니다.
그리나 실록에서는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고, '연려실기술'과 '승정원일기'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인조실록. 인조는 반정을 일으키고 병자호란을 맞은 왕이다 [조선시대 신숙녀 사건 주술 복수] / ⓒ 한국학중앙연구원)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631년 충청도에서 시댁 식구를 저주한 '신숙녀'라는 여인을 처리해 달라는 보고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 보고에서는 그녀가 무덤에서 유골을 파내어 시댁 집안에 들여놓고 저주를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주술로 인해 시아버지와 그 형 시 백부, 그리고 시동생이 괴질에 걸려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부모를 죽인 중죄로 여기고 '추고 경차관'을 내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불충분하여 결국 "혐의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합니다.
며느리 신숙녀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복원의 아들 이점과 혼인한 그녀는 아이가 없자 구박을 받고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시댁에서는 점점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고, 결국 미움을 한 몸에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쫓겨날 위기에 처하지만 겨우 위기를 모면한 신숙녀는 그때부터 아기를 낳기 위해 온갖 주술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 묻는 속옷을 입고 다니거나 동물의 시체를 찢어 놓는 등의 주술을 하다가 들킨 그녀는 마침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한 며느리의 사건이 기록되다 [조선시대 신숙녀 사건 주술 복수] / ⓒ ks_Park)
학대 끝에 쫓겨난 신숙녀는 무술인의 집에 찾아가서 복수를 할 방법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 후 그녀가 벌인 일은 무덤을 파헤쳐서 목 없는 시신을 집에 가져다 놓거나 동물의 시체를 찢어서 넣어 놓는 등의 기이한 일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쫓겨난 며느리의 복수치고는 상당히 무서운 방법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러고 몇 달 후 시아버지와 시 백부, 시동생이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술이 사람을 죽인다는 논리적 근거는 없었습니다.
어느 며느리의 복수
신문으로 옥사를 치렀지만 신숙녀 사건이 무혐의로 끝나자, 이번에는 고발한 남편과 시동생이 간원의 말대로 무고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본다면, 주술의 과학적 효과는 증명할 수 없으나 며느리의 복수가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시댁의 '이해'라는 사람이 다시 논쟁을 일으켜서 재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해는 인조반정의 공신이고 권력자가 되었으므로 정치적인 힘이 막강한 자였습니다.
(주술이란 무속적인 신앙으로 저주나 신념을 보내는 행위다 [조선시대 신숙녀 사건 주술 복수] / ⓒ jeonsango)
그로 인하여 과거에 신숙녀에게 혐의 없음을 판결한 두 경차관은 오히려 옥에 갇히고, 그녀를 모시던 두 여종이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기록에서는 신숙녀가 성질이 포악하다고 적혀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시부모를 죽인 친족 살해죄로 엄하게 다스릴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참혹한 고문을 받던 두 여종은 한결같이 혐의를 부정하다가 결국 죽어버리고, 더 이상은 주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어서 그녀는 다시 풀려났습니다.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그녀를 무고한 이해의 집안과 일족 10여 명이 구속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권력자였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다른 대신들과 양반들을 동원해서 상소를 올리고 그녀를 구속하라고 청원하였다고 합니다.
국제 질서를 이해 못하여 병자호란을 겪게 될 인조는 어느 새인가 권력자들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논리적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 주술이었습니다.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며느리의 죽음으로 사건은 끝났다 [조선시대 신숙녀 사건 주술 복수] / ⓒ kalhh)
재심사를 하자는 쪽은 시부모를 잘 모시지 못한 죄라도 물어야 한다고 했으나, 이미 끝난 재판을 다시 여는 것은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한 영의정은 반대를 했고, 우의정은 재판장에 임명되자 사직서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려 2년을 끌었던 며느리 신숙녀 사건... 그러나 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녀가 옥에서 목을 매어 자결해 버린 것입니다.
그녀가 실제로 실성한 짓을 했는지, 아니면 권력자들의 모함에 의해 악녀로 기록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법과 집행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대의 거울은 될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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