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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화가 최북 - 조선의 고흐, 괴짜 화가 최북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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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화가 최북 - 조선의 고흐, 괴짜 화가 최북 이야기

키스세븐지식 2019. 10. 6.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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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시대 화가 최북 - 조선의 고흐, 괴짜 화가 최북 이야기]

19세기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는 광적인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천재 화가면서도 자신의 귀를 자른 미치광이 화가로도 불립니다. 그런데 조선에도 그런 화가가 18세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고흐라고 불리지만 오히려 연대는 앞섭니다. 그는 정조 때의 애꾸눈 화가 '최북'입니다. 

괴짜 화가 최북은 자신의 눈을 찌르는 광기를 보였습니다. 조선 후기 화가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 유명하지만, 최북의 그림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그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처럼 우리 자연을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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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화가, 괴짜 화가 최북 


조선 정조 때의 괴짜 화가 최북은 18세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입니다. 정선의 화풍처럼 미적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훌륭한 산수화를 그렸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미국 성조기를 태극기처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양반들은 좀 더 심해서 중국을 부모의 나라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산수화도 중국의 자연만을 그렸던 시대였는데, 애꾸눈 화가 최북은 우리나라의 자연을 그린 진경산수화를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좀 배웠다고 목에 힘을 주며 중국에 미쳐 있던 양반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사진: 자신의 애꾸눈을 그린 최북 자화상(자신의 애꾸눈을 그린 최북 자화상 [조선의 고흐, 애꾸눈 괴짜 화가 최북] / 최북)



그의 자는 성기, 칠칠이었으며, 호는 호생관을 가장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가 '최칠칠'이 된 것은 원래 이름인 북(北) 자를 떨어트려 쓰며 칠칠(七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호로 불렸던 '호생관'은 "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이니 스스로 화가를 천직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를 거지 화가, 미친 화가로도 불렀다고 합니다. 매일 다섯 되의 술을 마셔대고 술주정이 심해서 '주광화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조선의 괴짜 화가 최북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합니다. 



그가 평생을 그림 한 점 팔아서 한 끼를 해결하며 살았던 것을 보면 거지 화가란 말이 괜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그렇게 평양과 동래를 오가며 살았는데, 나름 그림 솜씨에 대한 소문이 있어서 비단을 들고 와서 줄을 서며 기다리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양반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심해서 스스로 눈을 찌르기도 했는데, 애꾸눈 화가 최북의 모습은 조선의 고흐라는 광기 어린 모습이기도 합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체질적으로 양반을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진: 호생관 최칠칠의 공산무인도. 가운데 여백의 미가 놀랍다(호생관 최칠칠의 공산무인도. 가운데 여백의 미가 놀랍다 [조선의 고흐, 애꾸눈 괴짜 화가 최북] / 최북)



조선의 괴짜 화가 최북은 평소 <수호전>을 즐겨 읽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수호전은 나쁜 벼슬아치들을 혼쭐 내는 줄거리였기에 조선에서는 금서처럼 여겼었습니다. 

이처럼 강자에 대한 저항정신이 남달랐던 그는 어느 날 권력을 내세우며 그림을 그리라고 협박하는 양반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송곳으로 찔르면서 자해를 했습니다.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것이다"라며 그리기 싫은 것은 죽어도 못 그리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애꾸눈 화가 최북은 예술가의 자존심을 그렇게 지켰습니다. 




조선의 고흐, 애꾸눈 화가 최북 


호생관 최칠칠은 중인 신분이었으며 '김명국',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기인 화가로 꼽힙니다. 중인이었지만 왕족이었던 서평군 '이요'와도 꿀리지 않고 대등하게 지냈습니다. 유명인이 되자 함께 바둑을 두게 된 사연인데, 왕족이 한 수만 물러달라고 했는데도 굽히지 않고 대했다고 합니다. 이는 영의정까지 지닌 문장가 '남공철'의 전기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일화로, 한 벼슬아치가 "저 놈의 성이 무엇인가"하고 물었을 때 "내가 먼저 묻겠다, 자네의 성은 무엇인가?"라고 되받아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진: 진경산수화가 최북의 민화 서치홍포(진경산수화가 최북의 민화 서치홍포 [조선의 고흐, 애꾸눈 괴짜 화가 최북] / 최북)


호생관 최북은 지독한 탐미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금강산 구룡폭포에 올랐다가 "명사는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며 자살을 시도해서 주변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주위 사람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스스로 명인이라고 생각한 일화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스스로의 자부심도 강했는데, 스스로 만족하는 작품에 그림 값을 적게 준다고 하면 그림을 찢어버리고 욕을 해댈 정도였습니다. 반면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작품에 의외로 높은 값을 준다는 사람이 생기면 그림 값도 모른다고 웃으면서 돈을 도로 주고 가버리곤 했다고 합니다. 




괴짜 화가 최북의 행동은 놀라움의 연속이지만 능력만은 아무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였기에, 거지 화가였음에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최북의 일화 중에, 산수화를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린 그림에 산만 있고 물이 없어서 부탁한 사람이 당황했다는 사연이 있습니다. 조선의 고흐 최북은 "이 종이의 여백이 모두 물이니 물을 그릴 필요가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애꾸눈 최북은 반안경을 쓰고 한쪽 눈을 거의 종이에 대고 그림을 그릴 정도로 불편하게 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자부심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호생관 최칠칠의 지두화인 풍설야귀인도와 지두작(호생관 최칠칠의 지두화인 풍설야귀인도와 지두작 [조선의 고흐, 애꾸눈 괴짜 화가 최북] / ⓒ 최북)



영조, 정조 시대의 화가 호생관 최북의 그림은 <공산무인도>, <서치홍포>, <풍설야귀인도> 등 150여 점이 있고, 그중 60점의 영인본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공산무인도는 가운데에 아무것도 안 그리고 주변만 그려 놓은 그림으로 여백의 철학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서치홍포는 무를 파먹는 쥐의 모습을 그렸는데 최칠칠이라는 그의 자와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괴짜 화가 최북은 손가락, 손톱에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 화법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그림은 전남 무주에 있는 '최북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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