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 몽유도원도 데스노트 찬문? - 안평대군과 계유정난]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찬문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몽유도원도 데스노트라고도 불립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죽기 전에 꾼 꿈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 그림은 대한민국의 국보가 아니라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이란?
조선 초기인 1447년의 어느 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을 꿨습니다. 지상 낙원인 '도원경'에 갔던 것입니다. 신하 박팽년과 말을 타고 가던 중 신선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향했더니, 복숭아 향기 넘치고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 꿈을 그린 것이 <몽유도원도>이며 '찬문'을 지어 20여 명의 유명인들이 그림을 본 소감을 적었습니다.
(1m가 넘는 길이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꾼 도원경을 그린 것이다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안평대군 계유정난] / ⓒ 안견)
안평대군은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어서 '안견'에게 꿈을 설명하며 그려 달라고 했습니다. 안견은 조선을 대표하는 3대 화가이며 북송파 화풍으로 산수화를 현실감 있게 잘 그렸습니다. 안평대군 또한 글과 그림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안견을 매우 아꼈습니다. 이 그림은 1m가 넘는 길이에 명필 안평대군의 글이 적혀 있고, 따로 2개의 두루마리에 몽유도원도 찬문으로 보관됩니다.
(중앙시사매거진 사이트 캡처. 박경환이 찍은 사진에 찬문 두루마리가 보인다 [안평대군 계유정난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 ⓒ joins.com 박경환)
안평대군은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완성되고 3년 후, 정말로 꿈에 그리던 경치와 같은 곳에 별장 '무계정사'를 짓고 1만 권의 책과 그림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김종서, 성상문, 박팽년, 신숙주, 정인지 등을 불러 몽유도원도를 공개했습니다. 당대의 고위급 유명인사들이 그림에 대한 느낌을 시로 적었는데, 모두 친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데스노트인 몽유도원도 찬문이 됩니다.
(무계정사 터 아래쪽에 지은 무계원 안채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안평대군 계유정난] / ⓒ 오모군)
왜 몽유도원도 찬문이 데스노트가 되었는가? 그것은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에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장남 '문종'이 일찍 죽은 후 정치는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둘째 아들 '수양대군', 셋째 아들 안평대군, 그리고 문종이 단종의 미래를 부탁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입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과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가 되었습니다.
몽유도원도 데스노트 찬문
1452년,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단종이 왕에 올랐습니다. 부모가 모두 일찍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어른도 없었습니다. 이때 탐욕을 가진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의 권력자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에서 죽어야 했던 이유는 형보다 고명대신들과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와 후손들은 사약을 받아야 했으며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어린 단종 어진. 상상도이다. 사육신 사건 후 살해당한다 [안평대군 계유정난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 ⓒ 이규진)
어떤 설에 의하면,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찬문이 사본이 유출되어 '한명회'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뒤에서 조종한 인물이니, 몽유도원도 찬문은 데스노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에 적힌 인물이 모두 죽어야 했던 것은 아니고, 그중에 수양대군 편에 서지 않았던 인물들이 맞아 죽거나 목이 베이거나 사약을 받거나 고문을 받았습니다.
(세조 어진 초본.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단종의 삼촌이다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안평대군 계유정난] / ⓒ 김은호)
1952년 몽유도원도 찬문의 맨 앞에 글이 실렸을 것으로 보이는 '고득종'이 가장 먼저 죽음을 맞았습니다. 병에 걸려 죽었으므로 이때까지는 몽유도원도가 데스노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입니다. 그리고 19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종서가 철퇴에 맞은 후 칼에 찔려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현로'는 수양대군이 보낸 자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사육신이 고문을 받는 장면 [안평대군 계유정난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 ⓒ KBS)
수양대군은 자신이 난을 일으켜 학살을 해 놓고는 "난을 평정하였다"며 계유정난이라고 역사를 바꿔버렸습니다. 이에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났으니 '사육신'이라고 알려진 이들이 이때 죽었습니다. 그중 '성삼문', '박팽년', '이개'는 양평대군의 몽유도원도 찬문에 글을 남긴 인물입니다. 이들은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가문이 몰살당해야 했습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안평대군 그 후...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데스노트라는 말이 있는데,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몽유도원도의 찬문을 적은 이들 중 '신숙주', '정인지', '박연' 등은 수양대군에게 달라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성격이 호탕하고 예술을 알았던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죽으면서, 안평대군의 후손과 충신들의 후손은 대가 끊겼지만 이들의 후손은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드라마에서 김종서가 철퇴를 맞아 머리가 깨진 장면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안평대군 계유정난] / ⓒ KBS)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에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단종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관찰을 해볼 때,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처럼 왕권을 노렸다기보다는 고명대신들에게 반란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이란 다른 왕을 세우는 것이므로, 왕족 중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아야 했었을 것입니다.
(안견은 세종시대에 도화서에 있던 화원으로 인정받았다 [안평대군 계유정난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 ⓒ eggmoon)
다만, 안견은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죽기 몇 년 전에 사이가 멀어져서 살아났습니다. 안평대군이 귀한 먹을 구했는데, 그것을 몰래 가져가려다가 들키면서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이는 대세가 기울자 안견이 배신을 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안견은 몽유도원도 데스노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수집한 그림과 서적들은 수양대군의 보복으로 인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안견 몽유도원도는 사실적인 화풍인 북송화 형식이다 [안평대군 계유정난 안견 몽유도원도 찬문] / ⓒ 안견)
그리고... 현재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 중요문화재가 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중 약탈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1949년 일본의 미술상이 한국에 몽유도원도를 팔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60만 원(현재 가치 200억 원)의 부담 때문에 판매에 실패하고 일본 '덴리대학'에서 사들였다고 합니다. 최고의 그림, 최고의 명사들의 글, 그리고 안평대군과 계유정난의 역사가 새겨진 몽유도원도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미래에도 되찾아 올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