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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진실 - 탁경현과 희생자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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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진실 - 탁경현과 희생자들

키스세븐지식 2019. 9. 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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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진실 - 탁경현과 희생자들]

2014년 일본은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들의 유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여기에는 전쟁 때문에 죽어간 '안네의 일기' 등이 등재되어 있는데, 거기에 제국주의 만세를 부르던 특공대원들의 유서를 함께 등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일본 보수주의들의 침략시대를 그리워하는 미화 노력 중 하나입니다.

이 특공대원 중에는 조선인, 즉 한국인도 있었습니다.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들은 죽어서도 일본의 제국주의에 잡혀 있는 중입니다. 그 서글픈 사연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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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카제 특공대 탁경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미카제'는 일본어로 '신푸(神風. 한자어 신풍)'이라고 읽습니다. 신의 태풍이라는 뜻입니다. 13세기 고려, 몽골의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할 위기였는데 태풍이 와서 중단된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0개월 동안 약 3천8백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전투기를 탄 채로 미군 군함에 충돌해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조선인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도 있었습니다. 근래에 한 일본인이 한국에 위령비를 세우려다가 무산된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 


사진: 미군함을 공격하는 자살특공대의 전투기(미군함을 공격하는 자살특공대의 전투기 [가미가제 자살특공대] / ⓒ U.S. Navy)


세우려던 위령비의 주인공은 경남 사천의 미쓰야마 후미히로입니다. 창씨개명 전의 한국 이름은 '탁경현'.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위령비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정말로 친일파였을까요? 아직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인된 숫자만도 18명이나 되는 조선인 중 한 명인 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죽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묶여버린 이들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여섯 살 나이에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간 탁경현은 판자촌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몇 개 없던 약학전문대학에 들어가며 엘리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순사가 찾아와서 입대를 강요했습니다. 자원입대를 하지 않으면 생선 가게를 못하게 해서 먹고 살 수 없게 하겠다는 협박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자원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 2년 간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진: 탁경현의 모습과 공격받은 미군함 사진(탁경현의 모습과 공격받은 미군함 사진 [탁경현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 ⓒ USN)


그 훈련소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도병들이 있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이 짙어가자 이들 조선인도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희망서류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희망하지 않겠다고 할 수 없는 강압적 분위기였고 결국 그는 24세에 자살특공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자살폭격에 나서기 전날, 강압이 드러날까 봐 가족에게 편지도 못 쓰게 하자 식당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혼자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탁경현이 친일파인지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2001년 일본에서는 영화 <호타루>가 만들어졌습니다. 친구였던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영화입니다.(호타루 뜻: 반딧불이) 거의 3300기의 자살폭격기가 출격했지만 성공률은 겨우 11.6%. 하지만 살아 돌아올 확률은 0%.

급강하 폭격은 비행전문가도 어려운 것인데, 일본은 훈련병들에게 자살을 부추겼습니다.(실제로 직업군인은 몇 안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패율이 높고, 실제 목표인 항공모함은 실패하고 작은 피해만 입혔을 뿐입니다. 


사진: 조선인 카미카제 특공대의 사연이 담긴 일본영화 호타루 포스터(조선인 카미카제 특공대의 사연이 담긴 일본영화 호타루 포스터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 ⓒ 후루하타 야스오)


가미카제를 처음 시작한 것은 '오니시 타키지로' 중장입니다. 그는 나중에 사죄의 유서를 쓰고 자살합니다. 훈련병들은 강당에 집합당해서 지원서류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원이라고 하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한 나중에 전시할 목적이니 유서와 일기를 남기라는 지시도 받았습니다. 당연히 본마음을 적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차피 적어봐야 검열을 당할 것도 뻔합니다. 그중에는 숨어서 분노하거나 울부짖는 젊은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탁경현 같은 조선인의 가마카제 특공대 자료가 제대로 없어서 현재는 18명의 정도의 정보밖에 없습니다. 그중에는 겨우 17세 밖에 안된 소년도 있었고 최고 27세의 청년도 있었습니다. 그중 4명만 소위 이상의 계급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소년비행병 출신입니다. 

첫 조선인 희생자는 1944년 필리핀의 레이테만 전투에서 전사한 '인재웅'입니다. 일본명 마쓰이 히데오인 그는 친일시인 '서정주'가 쓴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강제로 전범들과 함께 영혼이 묻힌 일본 야스쿠니 신사(강제로 전범들과 함께 영혼이 묻힌 일본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 / ⓒ Wiiii)



물론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모두 강압인지, 아니면 모두 친일파인지는 자료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친일파가 아니더라고 휩쓸려서 참가할 수밖에 없는 정황을 봐서는 억울한 젊은이도 분명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확인된 11명의 사진은 일본 치란특공평화회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패는 일본 전범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조선인 위패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거부하여 죽어서도 전범과 떠도는 영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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