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 -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한일병합 이후 최대의 구속사건이 있었습니다. 무려 700여 명을 구속시킨 105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데라우치 암살사건으로 날조되어서 신민회 해체까지 이르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의 탄압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를 빌미 삼아서 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신민회가 어떤 단체였는지, 105인의 암살자들은 어떤 이유로 탄압을 받아야 했는지를 살펴봅니다.
데라우치 암살사건의 흐름 이해
20세기에 들어선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고 1905년 '을사늑약'을, 1910년 '한일병합'을 강제로 맺도록 합니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이에 1910년 '데라우치 암살사건'이 발생하였으며, 1911년 '105인 사건'이 터집니다. 이 사건은 '안명근 사건'으로도 불리는데, '신민회'가 해체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안중근 사촌동생 안명근의 상상화 [105인사건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 ⓒ 훈넷)
먼저 신민회란 무엇인지를 알아봅니다. 1907년 '안창호'와 서북, 서울 지역 인사들은 전국적인 비밀 단체를 조직하기로 했습니다. 주목적은 민족정신 지키기와 학교 설립 등 교육적인 활동이었지만, 독립군 양성 지원 등을 통해 '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정' 원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본받게 되었습니다.
(청산리 대첩 승리 후의 독립군.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많았다 [데라우치 암살사건 105인사건 신민회 해체] / ⓒ 국방일보)
을사늑약으로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기던 중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습니다. '안명근'은 안중근의 사촌동생인데 그 역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거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간도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조선 내에서는 군자금을 모았는데, 그러다가 생긴 것이 데라우치 암살사건의 시작인 '안명근 사건'입니다.
(1대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와 후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105인사건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 ⓒ UnKnown 편집 www.kiss7.kr)
1910년 안명근은 부자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했지만 '민병찬', '민영설'은 남의 일인 듯 모른 척했습니다. 이에 안명근은 화가 나서 권총으로 위협하며 훈계를 했었는데, 그들은 일본 헌병대에 밀고해서 안명근을 지명수배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안명근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조선총독이 참석할 것을 알고 데라우치 암살사건을 준비했지만 붙잡혔고 이것이 105인 사건의 원인이 됩니다.
(105인사건으로 인해 연행당하는 조선인들 [105인사건 신민회 해체 데라우치 암살사건] / ⓒ mpva.tistory.com)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당시 천주교 주교였던 '뮈텔'이 고해성사를 통해 알게 된 암살 계획을 일제에게 밀고했다고도 나옵니다.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명동성당 부지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데라우치 암살사건과 105인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비밀단체인 신민회 해체입니다.
105인 사건으로 번진 안명근 사건
일제는 안명근을 혹독하게 고문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명근 사건을 확대하여 신민회 해체까지 연결되는 날조 계획을 세웠습니다. 신민회의 기본 조직은 기독교였고, 안명근은 천주교도였으며 신민회의 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제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민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였기에 독립운동의 뿌리부터 흔들기 위해 집요하게 고문을 했고 결국 105인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안명근 교육사업이었던 해서교육총회의 교사와 학생들 [105인사건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 ⓒ 안중근의사기념관)
일제는 신민회 간부와 기독교 신자들을 잡아들이며 한일병합 이후 최대의 구속사건으로 확대시켰는데 이것을 105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때 체포된 조선인이 600여 명을 넘었었고 윤치호, 이승훈, 김구, 양기탁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가 체포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잡아들이다 보니 재판을 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일제는 7천 엔을 들여서 임시 법정을 지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일제에게 끌려가는 105인 사건 관련자들 [신민회 해체 105인 사건 데라우치 암살사건] / ⓒ igoodnews.net)
이들은 600여 명의 사람 중 주범이라며 128명을 기소하였고, 그 후 105명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105인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105인 사건은 데라우치 암살사건을 핑계로 한 일제의 자작극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안중근 의거에 대해 보복을 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이은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무단통치'를 시행하려던 것이었습니다.
(방송에서 소개된 신민회 주요인사들 사진 [105인사건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 ⓒ EBS영상)
안명근 사건, 즉 데라우치 암살사건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되었지만, 애초에 날조사건이었기 때문에 99명은 무죄 석방되었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등에게만 6년 이하의 징역형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민족의 전국적 최대 비밀 단체인 신민회 해체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해외에서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전해지며 비난 여론이 생겼습니다.
신민회 해체와 독립운동
신민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정치형태로 삼았습니다. 비밀조직이었지만 활동의 대부분은 합법적이었고, 교육과 양성평등 등의 계몽사상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사건과 105인 사건 때문에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민회가 해체되었지만, 이들은 간도 독립세력과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당시 사진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 105인사건 신민회 해체] / ⓒ yka.or.kr)
일제의 105인 사건의 인사들은 매우 혹독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죽거나 고문을 피해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때부터 미국 망명자가 되어야 했고, 김규식은 몽골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이승훈은 기차역에서 동료가 잡혀가는 것에 눈물을 보였다가 일제 경찰의 검문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암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모티브로 시작된다 [105인사건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 ⓒ 최동훈)
신민회는 지식층 38%, 일반 시민층 37%와 종교, 노동자 등이 가입한 항일단체입니다. 그러나 신민회는 서로 가입된 자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 있어서 105인 사건의 신민회 해체까지 조직원은 비밀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시작한 신흥무관학교는 그 이전 같은 주먹구구식 항쟁이 아니라 일제 정규군과 싸울 수 있는 현대적 군대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기념사진 [데라우치 암살사건 신민회 해체 105인사건] / ⓒ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안명근 사건은 같은 민족의 배신에 의해 시작되었고, 데라우치 암살사건 미수는 종교인의 타락 때문이었으며, 105인 사건은 무단통치의 악랄한 날조였고, 신민회 해체는 일제의 음흉한 흉계가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독립운동가들은 견딜 수 없는 고문과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화 암살은 데라우치 암살사건을 모티브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