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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의자왕 - 예식진의 배신과 나당연합군

2019. 2. 6.

[백제 멸망, 의자왕 - 예식진의 배신과 나당연합군]


흔히 백제는 의자왕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망할 나라가 망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억울한 평가를 받은 왕이고, 백제도 더 견딜 수 있는 국력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멸망한 백제의 핵심에는 배신자 예식진이 있습니다. 백제 멸망을 저지르고 고구려까지 무너지게 만든 예식진에 대한 학설을 소개합니다. 





의자왕과 백제 멸망 


역사에서 '의자왕'이라고 하면 삼천궁녀와 방탕한 생활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사대적인 신라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이 악의적으로 깎아내린 행위입니다. 의자왕은 백제 멸망 5년 전까지만 해도 한 달만에 30여 개의 성을 빼앗는 등 19년 동안 신라의 성 100여 개를 빼앗고 영토를 넓힌 왕입니다. 그런데 660년 웅진성으로 옮긴 후 갑자기 항복을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진: 억울한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초상화(억울한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초상화 [백제멸망 의자왕 예식진 나당연합군] / ⓒ Unknown)


서기 660년 신라는 당나라를 꼬드겨서 백제로 쳐들어갔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백제는 중앙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지방 호족의 지방군이 도워주러 오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과 5천 결사대가 전멸한 후, 백제 멸망을 막고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도 건재한 지방군의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방 호족 또는 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처럼 중앙집권이 되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대적인 전투를 하려면 군대를 보유한 귀족, 호족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더구나 나당연합군은 지방성을 공격하지 않고 바로 백제 수도로 바로 진격했기 때문에 뒤쪽을 친다면 백제 멸망에서 의자왕을 구해낼 수도 있었습니다. 


사진: 멸망 시기에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던 웅진성(멸망 시기에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던 웅진성 [의자왕 예식진 백제멸망 나당연합군] / ⓒ gongju.go.kr)


의자왕은 수도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며 항전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 미스터리의 하나가 여기서 발생하여 의자왕은 백제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나당연합군이 특별한 공격을 하지도 않았는데 5일 만에 문을 열고 나와 갑자기 항복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백제가 멸망하여 동아시아의 균형이 깨진 뒤, 668년 고구려도 멸망하고 당나라에게 점령당합니다. 




미스터리 역사 예식진 


아직 지방군이 건재하고 나당연합군의 식량이 모자라기 시작할 즈음인데, 갑작스러운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 멸망이 왔다는 것은 지금까지 미스터리 역사였습니다. 이 궁금증이 해결되는 데에는 웅진성의 '예식진'이란 인물이 필요합니다. 중국의 역사책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했다"고만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가설은 가능합니다. 


사진: 화려한 문화와 중국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의 유물(화려한 문화와 중국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의 유물 [백제멸망 나당연합군 의자왕 예식진] / ⓒ Isageum)


보통 이런 역사적인 기록에는 중요한 사람이 주어가 되고 먼저 언급됩니다. 그런데 구당서, 신당서에는 예식진이 먼저 언급되고 의자왕을 데리고 항복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더구나 당나라 역사에는 외국인 중에 당나라를 위한 최고의 공을 세운 사람이 예식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식진이 의자왕을 잡아서 바치며 항복을 한 것이라는 가설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민족 역사학의 대가인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웅진 대장이 왕을 잡아 항복했는데, 왕이 자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제 멸망과 의자왕의 항복에 등장하는 예식진은 웅진성의 방령이며 백제의 '좌평'이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의자왕이 장기전을 하려고 왔는데 예식진이 배신하고 의자왕을 바쳤다는 것이 됩니다.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의 시작이 그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진: 중국에서 발견된 배신자 예식진의 묘비 문자(중국에서 발견된 배신자 예식진의 묘비 문자 [예식진 백제멸망 의자왕 나당연합군] / ⓒ yna.co.kr)


물론 백제 멸망이 예식진 배신 때문이라는 것에는 반대의견도 많습니다. 다른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래에 중국에서 예식진의 묘비가 발견되며 이 가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백제 웅진 사람이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에 올랐다고 적혀있습니다. 백제 고위 관직인 좌평에 있던 예식진이 당나라에서 특별한 큰 공도 없이 핵심 관직에 올랐다는 것은 의심할만한 사실입니다. 




배신자 예식진 


나당연합군은 백제 지방군을 무찌르지 않고 곧장 사비성으로 진격했습니다. 빠른 시간 내의 백제 멸망은 의자왕을 잡는 것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의자왕은 무사히 웅진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 오히려 나당연합군이 당황하는 상황이 됩니다. 나당연합군의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었고, 백제 지방군의 반격을 받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사진: KBS에서 방송한 의자왕의 미스터리 화면(KBS에서 방송한 의자왕의 미스터리 화면 [의자왕 예식진 백제멸망 나당연합군] / ⓒ KBS)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평지에 있지만 웅진성은 험악한 산성으로 되어 있어서 공격이 어렵습니다. 더구나 가까운 곳의 '임존성'에서 '흑치상지' 장군이 지원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나당연합군의 진격 때문에 혼란에 빠졌던 백제의 지방 세력들도 정신을 차리고 대책을 세울 때입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나당연합군이 공격을 멈추었는데, 예식진과 의자왕이 스스로 나와 항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백제 멸망이 왜 이렇게 허무하게 벌어졌는지 궁금해 해왔습니다. 백제가 이겨낼지 아닐지는 모르더라도, 당시 백제의 국력에 비한다면 너무나 쉽게 망했으니 말입니다. 고구려가 내분에 의해 멸망했듯이 백제도 내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백제 멸망의 경우 더욱 악질스러운 것은, 쿠데타에 의한 내분이며 배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중국측에 기록된 예식진에 대한 기록(중국측에 기록된 예식진에 대한 기록 [예식진 나당연합군 백제멸망 의자왕] / ⓒ KBS)


예식진은 당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떵떵거리고 살았습니다. 반면 백제의 백성들은 백제 멸망을 이겨내고자 수십 년을 더 싸워야 했고, 그러고도 패했습니다. 후방이 편해진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침공해서 멸망시킵니다. 자신만의 이익을 쫓는 자로 인해 두 개의 나라가 무너지고 만주지역을 중국에게 갖다 바치는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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