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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정충신 장군 - 노비에서 포도대장이 되다

키스 키스세븐 2018. 12.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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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정충신 장군 - 노비에서 포도대장이 되다] 

충무공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순신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12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은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신분제도에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또한 권율의 사위이고 이항복의 동서이기도 한 명장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충신, 노비에서 포도대장의 길로 


조선시대 충무공 '정충신' 장군을 설명하자면, 강직하고 청렴하며 지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오르는 인생역전을 이루었습니다. 전남 광주의 '금남로'는 그의 '군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기도 합니다. 충무공은 신하가 죽은 뒤 붙여주는 시호인데, 정충신 외에 권율, 이순신, 김시민, 남이 장군 등이 이 시호를 받았습니다. 


사진: 정충신의 그림 - 포도대장이 된 노비(정충신의 그림 - 포도대장이 된 노비 [충무공 정충신 장군] / ⓒ Unkown)


1576년에 태어난 그는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서 국가의 운명과 함께 했습니다. 기록으로는 고려 명장 '정지'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지방의 아전일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황룡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깨어난 후 여자 하인과의 사이에서 충무공 정충신 장군을 낳았습니다. '노비종모법'에 따르면 그도 노비인 셈입니다. 그러니 그때는 이름도 일반 노비의 이름이었습니다. 


사진: 광주 금난로의 유래는 정충신 장군의 군호를 딴 것이다(광주 금난로의 유래는 정충신 장군의 군호를 딴 것이다 [장군 정충신 충무공] / ⓒ Minseong Kim)


절도영에서 일을 하던 정충신이 노비에서 포도대장으로의 미래를 맞는 변환점은 임진왜란 때 '권율'의 노복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총명하여 권율의 총애를 받던 이때, 의주로 도망간 '선조'에게 '장계'를 보고할 일이 생깁니다. 전남에서 평안북도까지 깔린 왜군을 뚫고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열일곱 살의 정충신이 지원하자 주변에서 말릴 정도로 위험했습니다. 


사진: 임진왜란 조선군 총대장 권율 장군의 그림. 정충신을 사위로 맞았다(임진왜란 조선군 총대장 권율 장군의 그림. 정충신을 사위로 맞았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 / ⓒ 장우성)


하지만 노비 정충신은 목숨을 걸고 선조에게 보고서를 올리는 것에 성공했고, 선조는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때 병조판서를 하던 사람이 '이항복'입니다. 정충신의 인간됨을 아끼어 학문을 가르치고 무예를 익히게 하였습니다. 이항복은 정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고, 그도 무과에 급제하며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충무공 정춘신 장군의 활약 


정충신이 노비 출신이었기에 업신여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워낙 총명하여 명나라와 왜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어와 일본어도 능숙해지고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능력도 높아졌습니다. 그 사이, 총애하던 권율의 사위가 되고 이항복과는 동서가 되었습니다. 권율의 세 사위는 신립, 이항복, 정충신입니다. 


사진: 왼쪽 신립 장군. 오른쪽 오성과 한음의 이항복. 권율의 첫째, 둘째 사위다(왼쪽 신립 장군. 오른쪽 오성과 한음의 이항복. 권율의 첫째, 둘째 사위다 [장군 정충신 충무공] / ⓒ Unkown)


광해군 때는 그나마 후금(청나라)과의 관계에서 실리외교를 하자는 "북인"들이 있었기에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중립외교가 비판받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외교술까지 좋았기 때문에 무신이면서도 북방민족과의 외교까지 맡아 일했습니다. 그러나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들어선 뒤에는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명나라를 받드는 "서인" 때문에 지방 자리에만 임명되었습니다. 


사진: 정충신 충무공이 생전에 입던 갑옷이다(정충신 충무공이 생전에 입던 갑옷이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 / ⓒ hadong-jung.com)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은 1만 2천 명의 대병력으로 밀고 내려와서 한양까지 점령해버렸습니다. 원래 이괄과 '남이흥', 정충신 장군은 친한 사이였지만 임무에 강직한 충무공 정충신과 남이흥은 한양까지 이괄을 추격했습니다. 정충신과 남이흥은 겨우 2천 명의 병사로 뛰어들어 계략에 빠트린 후 이괄이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진: TV에 나온 이괄의 난의 진격로. 한양을 점령한 뒤 급격히 진압당했다(TV에 나온 이괄의 난의 진격로. 한양을 점령한 뒤 급격히 진압당했다 [장군 정충신 충무공] / ⓒ KBS)


반란군에게 한양까지 빼앗겼던 인조는 되돌아와서 이들을 치하했습니다. 그러나 청의 침략에 방비해야 한다는 이들의 충고는 무시되고 다시 지방관직으로 밀려났습니다. 여러 번의 역모사건에 억울하게 휘말릴 때 인조가 보호해 주긴 하였으나,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외교술과 정보탐색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앉아서 큰소리만 치는 자들이 인조와 권력을 꿰찼기에 조선은 망국으로 가고 있을 뿐입니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인간성 


마침내 후금의 침략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늙은 나이에도 부원수로 임명받아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어도 중앙관리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충무공 정충신 장군을 귀향 보내곤 했습니다. 청과 외교를 끊는 것은 전쟁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정충신은 포도대장에 올라 천민으로서는 최고의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사진: 정춘신 충무공의 사당을 현충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정춘신 충무공의 사당을 현충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 / ⓒ hcs.cha.go.kr)


여러 야사를 보면 정충신 장군의 인간성도 알게 됩니다. 어린 날 거둬들인 권율을 아버지처럼 여겼으며, 학문으로 인도한 이항복이 유배지에서 중풍에 걸렸을 때는 유배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돌봐줄 정도였습니다. 또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도 썩은 대신들 때문에 밀려난 그를 챙겨준 '장만' 장군을 끝까지 보필하며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진: 광주 페스티벌 사이트에 나온 정충신 기념 포퍼먼스 장면 캡처(광주 페스티벌 사이트에 나온 정충신 기념 포퍼먼스 장면 캡처 [장군 정충신 충무공] / ⓒ fringefestival.kr)


또 다른 얘기도 있습니다. 성품이 청렴하여 비리라는 것을 몰랐기에 가난을 벗어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충무공 정충신 장군이 유배를 떠났을 때는 가족들이 먹고살기 힘들어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옵니다. 출세하고 돈을 벌었다고 목에 힘주며 갑질을 하는 자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지장으로, 적진에서는 외교관으로, 관리로서는 청렴함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서산시에서 공개한 정충신문서일괄의 사진(서산시에서 공개한 정충신문서일괄의 사진 [충무공 정충신 장군] / ⓒ Seosan City Government)


남이흥과 정충신 장군이 요청한 대로 인조가 북방의 군사를 신경 썼다면 병자호란에서 덜 고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충무공 정충신 장군이 노비에서 포도대장과 도병마사까지 오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함, 그것을 바탕으로 쌓아가는 유능함과 영특함, 이것은 어쩌다 운 좋게 신분 상승을 노리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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