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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 김자점과 이괄의 난

2017. 10. 1.

[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 김자점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등장으로 국제정세가 변한 원인과 조선 인조의 대처가 무능력했던 원인도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겹친데 덮친 격으로 악재도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 패배의 원인 중 하나인 이괄의 난과 김자점 문제는 백성들이 피눈물을 치러야 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글의 순서]

1.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

2.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

3.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

4.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


[엮인 글]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전투

임진왜란부터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남한산성까지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선조와 함께 무능한 왕으로 꼽힙니다. 사대주의에 얽매어 전략적으로 무능했던 것은 맞지만, 인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벽을 축조하고 병력을 모우는 등의 노력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청나라가 강국이었다고 하지만, 정묘호란에서 방어가 쉽게 무너지고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로 나오는 것이 '이괄의 난'입니다. 


사진: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남부의 관군이 무너졌다. 조선의 대표 정규군은 평안도 부대였다. 하지만 그 병력은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괄의 난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다.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사진: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남부의 관군이 무너졌다. 조선의 대표 정규군은 평안도 부대였다. 하지만 그 병력은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괄의 난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다.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 / ⓒ 편집 www.kiss7.kr)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광해군이 쫓겨났습니다. 인조반정에는 '최명길', '이귀', '김류', '김자점' 등 서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서인들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대비 못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인이 정권을 잡자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한 날,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소식에 반란군을 지휘하기로 한 '김자점', '이귀' 등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괄은 직접 대장이 되어 반란을 성공시켰으며 광해군을 잡았습니다. 


사진: 인조반정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권을 가로챈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최명길, 이괄, 김자점 등이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사진: 인조반정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권을 가로챈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최명길, 이괄, 김자점 등이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정규군을 날려먹은 이괄의 난] / ⓒ ebsi)


이괄의 결단 때문에 인조반정이 성공했지만, 그는 2등 공신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이괄은 서인과 사이가 가깝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조는 이괄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후, 이괄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평안도 관군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남부 관군의 병력 손실이 컸기 때문에 평안도의 병력은 사실상 조선의 주력 정규군이며, 그 후 일어날 정묘호란에서 후금에 맞서야 할 군대입니다. 이 부대가 살아남았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치욕을 그리 쉽게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 


그런데 이괄에게 인조반정을 하자고 꼬드긴 이귀가 배신하며 이괄의 아들을 역모죄로 엮으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괄은 아들이 금부도사에게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자, 그동안의 서인들의 배신감에 분노했습니다. 

여기에는 무턱대로 아들을 보내라고 했던 인조도 잘 못이 있습니다. 북방에서 유일한 정규군을 보유하고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괄이 어떤 짓을 할지에 대한 아무 대비책도 없었습니다. 인조는 이괄을 좋아하고 매우 믿었으므로, '이괄의 난' 소식을 듣고도 처음엔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진: JTBC 자료화면. 인조가 회의 중에 있다. 서인에게 따돌림 받은 이괄이 모함까지 받자 일어난 이괄의 난에서 인조가 고민을 하고 있는 장면.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사진: JTBC 자료화면. 인조가 회의 중에 있다. 서인에게 따돌림 받은 이괄이 모함까지 받자 일어난 이괄의 난에서 인조가 고민을 하고 있는 장면.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 / ⓒ jtbc)


이괄은 압송하던 금부도사를 죽이고 아들을 구출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진군하는 길을 막는 방어군들은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괄의 난은 겨우 19일 만에 한양을 점령할 정도로 매서운 기세였습니다. 

인조반정 세력은 급히 한양을 버리고 충남 '공주'로 도망을 쳤습니다. 임진왜란의 '의주'와 병자호란 '남한산성' 피난 사이에 내란으로 파천이 생긴 것입니다. 그 동안 한양에 있던 부인 등 이괄의 가족들은 역적의 가족이 되어 갈가리 찢겨 죽었습니다. 


사진: KBS 자료화면. 결국 이괄은 부하의 배신에 의해 목이 잘리고, 인조와 서인들의 문제점으로 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막아낼 북방방어군이 몰락하는 사건이 되었다.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사진: KBS 자료화면. 결국 이괄은 부하의 배신에 의해 목이 잘리고, 인조와 서인들의 문제점으로 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막아낼 북방방어군이 몰락하는 사건이 되었다. [정묘호란의 패배 - 이괄의 난] / ⓒ kbs)


한양까지 접수한 이괄의 난은 기세가 하늘을 찔렀지만, 한양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않으면서 해이해 졌습니다. 결국 정부군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당하면서 '이천'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이괄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전체적인 역사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괄의 난으로 잘 훈련된 북방의 정규군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경험이 풍부한 부대가 사라지면서 정묘호란의 방어가 약해졌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달려갈 근왕병의 질도 떨어지게 됩니다.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 


'김자점'의 조상은 단종 복위를 시도하던 '사육신'을 배신하고 죽게 만든 '김질'입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서인으로 인조에게 신임 받던 사람입니다. 

후금이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침입할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김자점 때문에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전투는 완전히 청나라의 작전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더구나 명장 '임경업'을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지금도 간신으로 여기는 인물입니다. 


사진: JTBS 자료화면. 드라마에서 김자점을 연기하는 모습. 특히 조선 육군의 명장으로 꼽히는 임경업 장군을 모함에 빠트려 죽인 사건으로 국민적 반감을 받는 인물이다.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사진: JTBS 자료화면. 드라마에서 김자점을 연기하는 모습. 특히 조선 육군의 명장으로 꼽히는 임경업 장군을 모함에 빠트려 죽인 사건으로 국민적 반감을 받는 인물이다.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 / ⓒ jtbc)


김자점은 최명길, 이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불같아서 일의 추진력은 있었기에 인조가 좋아하였습니다. 정묘호란 때는 왕의 강화도 피난을 모셨다고 공신 대접을 받고 도원수가 되었습니다. 

선조 때도 왕을 따라 의주로 도망갔던 대신들을 80명이나 공신에 올리면서도, 정작 목숨을 걸고 싸운 장군들은 겨우 18명만 공신이 되었었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진: 만주 지방의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운 뒤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후금이다. 또 그 후에 이름이 바뀌는데, 그것이 청나라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청나라와의 전쟁이다.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사진: 만주 지방의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운 뒤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후금이다. 또 그 후에 이름이 바뀌는데, 그것이 청나라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청나라와의 전쟁이다. [무능한 인조의 총애를 받은 김자점] / ⓒ timetoast.com)


특히 이괄의 난이 끝난 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군의 책임자들은 지방 책임자들을 감시하는 자들로 채워졌습니다. 전투 실무보다 감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군대는 훈련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반란을 모의했다는 모함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김자점뿐만 아니라 강화도를 책임진 '김경징'도 술을 마시고 방어를 안하다가 왕실가족들이 사로잡히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강화도를 빼앗긴 것은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조정이 결국 항복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조 시기의 책임자들이 다 이런 식이었으니 정말 실력 있는 사람들은 능력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 


김자점이 도원수로 있던 1636년 청태종 '홍타이지'는 14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김자점이 태만하여 침략소식을 늦게 보냈으므로, 청나라 군의 진격 소식은 항상 뒤늦게 조정에 전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묘호란 때도 시행된 인조의 강화도 항전이 무산되고,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전쟁이 됩니다. 더구나 청나라 군이 우회하여 한양으로 직행하는데도 꼼짝 않고 있다가 인조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전투를 하러 뒤늦게 출발했습니다. 


사진: 병자호란 ~ 남한산성 전투 사이의 지명들. 정방산성에서 동선령 전투가 있었다. 김자점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으면서 조선의 멸망을 방치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사진: 병자호란 ~ 남한산성 전투 사이의 지명들. 정방산성에서 동선령 전투가 있었다. 김자점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으면서 조선의 멸망을 방치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 / ⓒ www.kiss7.kr)


이미 한양으로 향하는 청나라 군을 쫓아 황해도에 갔을 때, '정방산성' 인근의 '동선령 전투'에서 '이완'은 청나라 군을 전멸시키는 등의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완 장군이 합류한 후 김자점은 '토산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습격에 김자점은 달아나고 이완 혼자서 포위되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항복할 때까지 도원수인 김자점이 싸운 전투는 이게 다 입니다. 함경도 정규군까지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인조가 항복한 후에야 본진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진: 정묘호란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이괄의 난이라면,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 중 하나는 김자점일 수밖에 없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사진: 정묘호란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이괄의 난이라면,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 중 하나는 김자점일 수밖에 없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 / ⓒ 최종병기 활)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굴욕으로 전쟁이 끝난 후 김자점은 토산전투 패배로 인해 유배를 당했지만, 인조의 보살핌 속에 1년 만에 정치에 복귀했습니다. 그 후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임경업 장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에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열렬한 친청파가 되어 다른 대신들을 몰아내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인조가 김자점을 얼마나 총애했냐면, 심지어 죽을 때 김자점을 자신처럼 대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경기도청에서 남한산성 등 역사홍보를 위하여 제작한 영상의 한 장면. 인조를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명나라가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사진: 경기도청에서 남한산성 등 역사홍보를 위하여 제작한 영상의 한 장면. 인조를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명나라가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패배 - 김자점] / ⓒ 경기도청)


그런데 인조 이후 즉위한 효종이 김자점을 내치자, 김자점은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청나라에 밀고했습니다. 더구나 1651년, 김자점의 아들이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김자점과 후손은 역적이 되어 능지처참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동안 도원수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김자점은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게 만들고도 총애를 받았지만, 인조가 죽은 후 삼족을 멸하는 역적으로 역사 속에 사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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