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전투]
16세기와 17세기는 조선에게 최악의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40여 년 동안 연이어 겪었으니, 평생 네 번의 대 전쟁을 겪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항복을 하던 삼전도의 치욕 등 병자호란 남한산성과 역사 줄거리를 통해, 현대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도 중요한 일입니다.
[글의 순서]
1. 병자호란 남한산성 - 백성
2. 남한산성 줄거리 - 청나라
3. 남한산성 전투 - 조선
4. 역사 줄거리 - 남한산성
[엮인 글]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1 - 백성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역사 줄거리를 읽기 전에 조선 중기의 4대 전란 시기를 알아두면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기가 좋습니다.
임진왜란 : 1592년 4월 ~ 1593년 1월 휴전
정유재란 : 1597년 1월 ~ 1598년 11월
정묘호란 : 1627년 1월 ~ 1627년 3월
병자호란 : 1636년 12월 ~ 1637년 1월
이중에서 역사 줄거리 상 중요한 전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입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연속이고, 정묘호란은 병자호란의 전초전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두 영화, 남한산성과 최종병기 활의 포스터. 국가적 치욕이라는 것을 또 다른 관점에서 본 두 가지 영화이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1 - 백성] / ⓒ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
이렇게 볼 때, 1575년에 태어난 사람은 10대에 임진왜란, 20대에 정유재란, 50대에 정묘호란, 60대에 병자호란을 겪습니다. 만약 이때 태어난 사람 중에 하필 왜군의 진격로인 평양까지와 청군의 진격로인 남한산성까지의 겹치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면? 또는 그 지역의 병사였다면?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역사 줄거리는 국가적으로도 큰 치욕이지만, 백성들에게는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사진: 삼전도의 굴욕을 표현한 부조를 편집한 이미지. 남한산성(병자호란)에서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서 치욕적 역사를 남기게 된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1 - 백성] / ⓒ 삼전도 치욕 부조)
추정 자료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인구는 416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후의 인구는 152만 명입니다. 약 264만 명이 사라졌다는 얘기입니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파천하고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할 때 죽어간 백성의 수와 병사들의 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또한 약탈과 함께 닥친 식량부족, 질병, 인질 등은 지배층이 겪어보지 못하는 민초들만의 고통입니다.
(남한산성(병자호란)은 백성에게 정치인보다 더한 고통을 남겼다. 나라의 치욕에 더해서 약탈과 인질과 피폐한 삶까지 격어야 하는 것이 백성이었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1 - 백성] / ⓒ KBS)
사라진 인구 중 약 30만 명 이상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를 볼 때는 정권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백성의 애환도 함께 느껴야 합니다.
흔히 예를 드는 "화냥년", "호로자식"이라는 단어도 이런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들을 멸시했던 역사적 아이러니가 담긴 말입니다. 이 전쟁은 정권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치욕으로 남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가족의 죽음과 쑥대밭이 된 가정의 원통함을 가진 시기인 것입니다.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2 - 청나라
'청나라'는 이전에 '후금'이라는 나라로 정묘호란을 일으킨 여진족의 나라입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명나라는 쇠퇴해 가고 청나라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산해관에 막혀서 명나라를 제압하지 못하는 시기이므로 청나라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한 문제를 가진 때입니다.
더구나 명과 무역이 끊기고 기상악화로 농작물을 실패하면서 생필품 가격이 올라가고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졌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역사 줄거리는 이러한 청의 난관이 원인입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 전후의 동아시아 세력도. 병자호란 이전에 청나라는 산해관에 막혀서 명나라 침공이 어려운 때였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2 - 청나라] / ⓒ www.kiss7.kr)
이런 상황에서 청태종 '홍타이지'는 14만 대군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그러나 청의 국내 경제사정이 급박했고 처음부터 속전속결 작전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후방 보급은 충분치 못했습니다. 명을 치기 전에 뒤통수가 될 조선을 잡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약탈과 조공으로 경제적인 급한 불도 꺼야 했습니다.
더구나 명이 공격해 오기 전에 빨리 되돌아 가야했던 청나라의 속사정이 깔린 것이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역사 줄거리입니다.
(사진: KBS 자료화면. 남한산성(병자호란)은 압록강이 어는 12월에 벌어졌으며 두달만에 패한 전쟁이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2 - 청나라] / ⓒ KBS)
병자호란의 흐름을 본다면 조선은 고구려 때처럼 청야전술을 쓰며 장기전을 펼쳐서 포위하는 전략을 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청나라는 애초부터 조선 임금만을 공략하기 위한 전술을 택했습니다. 압록강에서 한양 사이의 방어성들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기마병의 속도전을 이용해서 바로 한양으로 달렸습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줄거리는 청의 전격전에 조선이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진 사건입니다. 결국 청의 의도대로 병자호란의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히게 됩니다. 전술적으로 조선이 완전히 당한 것입니다.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3 - 조선
정묘호란을 치른 후의 조선의 전략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청나라는 대륙의 군대이니 수군을 통한 공격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강화도에서 장기간 항전한다는 것입니다. 청나라도 정묘호란을 통해서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속도전을 하고 수군작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병자호란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존재는 도원수 김자점입니다. 김자점은 진격 정보를 늦게 알려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갈 시간이 모자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조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곳이 남한산성입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의 역사적 지역. 인조는 강화도 피난을 하려 했으나 남한산성에 있다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해야 했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3 - 조선] / ⓒ 구글맵, 편집 www.kisss7.kr)
하지만 사실 조선의 상태는 최악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은 아직도 심했고, 이괄의 난으로 인해 경험이 풍부한 북방 정규군이 사라졌으며, 군책임자들은 반란을 감시하기 위한 자들로 채워졌고, 그로인해 군대는 모함을 받을까봐 훈련을 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차지한 서인들은 측근들을 각종 벼슬에 앉혔고, 정작 전투 실무에 뛰어난 장군들은 한직으로 내몰려서 지휘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 당시의 정권은 서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고 광해군을 내쫓은 후 병자호란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였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3 - 조선] / ⓒ baegjins)
그렇다고 인조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름 성벽도 축조하고 직업군인인 어영군, 수어청 등을 신설했으며 속오군 병력도 9만 명까지 대비했었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14만 명이 넘었지만,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생각한다면 9만 명도 적은 수는 아닙니다.
병자호란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에서의 문제는 지도층의 썩은 생각 때문에 체계적인 지휘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각 지방의 속오군들은 근왕병이 되어 달려왔지만, 각각 중간에서 격파 당해 버린 것입니다.
(사진: 그나마 광교산 전투, 김화 전투에서 이완 장군 등의 활약으로 조선군의 승리가 있었다. 그러나 남한산성(병자호란)은 공신인 문신들이 끼어들어 망친 전투가 여럿 있었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3 - 조선] / ⓒ arielmore)
물론 '광교산 전투'나 '김화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하긴 했으나, 나머지는 소규모 부대로 각자 상대하다가 격파 당했습니다. 강원감사는 7천명으로 덤비다가 당했고, 충청감사는 험천에서 대패했으며, 평안감사는 김하에서 막히고, 전라감사는 6천명으로 오다가 퇴각했습니다.
더구나 '쌍령전투'는 4만 명을 모집하고도 수천여 명의 청나라 군에게 전멸했습니다. 원인은 실전 능력이 없는 문신들이 지휘에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정규군을 거느린 도원수 김자점은 양평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이제 남한산성 줄거리로 넘어갑니다.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 4 - 남한산성
조선군은 청나라의 기병이 강했기 때문에 평지가 아닌 성에서 방어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청군은 아예 무시하고 우회해 버렸습니다. 조선군은 오히려 지나가버린 청나라 기마병을 추격해야 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인조반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습니다.
왕실 가족이 먼저 강화도로 떠나고 인조가 떠나려는 사이에, 청나라 군은 그 길목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정묘호란을 통해 이미 조선의 전략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전투 줄거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에서 버텨내야 했던 역사 고적인 수어장대의 모습. 요새인 것은 분명했지만, 근왕대가 없는 전쟁은 무기력했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4 - 남한산성] / ⓒ kh1129m0)
남한산성은 제법 방어가 잘 된 산성입니다. 아시아 최강의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45일이나 버텼으니 제몫은 다한 셈입니다.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 역사 줄거리의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남한산성의 식량문제였고, 둘째는 강화도 점령 사건이며, 셋째는 지방군의 포위작전 실패입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1만 2천의 군사는 청의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식량이 떨어지고 강화도가 점령당하면서 전의를 잃게 됩니다.
(사진: 치욕의 역사를 지닌 남한산성(병자호란) 성터의 모습. 근왕병 의무를 게을리한 도원수 김자점은 인조의 총애 속에 다시 권력을 잡았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4 - 남한산성] / ⓒ bae6607)
고려 때부터 강화도는 북방민족의 공격에서 조정을 지키는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권력에 눈이 멀어 벼슬을 나눠먹기 했던 서인들 때문에 남한산성 줄거리는 막을 내려야 했습니다.
강화도를 책임진 '김경징'은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고 제대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 공신의 아들인 김경징은 주변의 경고를 무시하고 방심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강화도가 청군의 손에 넘어가자 가족들마저 버리고 혼자 배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물론 세자 등의 왕족들은 모두 사로잡혀 버렸고, 남한산성의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에서 항복을 한 후 세워진 삼전도비. 비석의 위쪽에 있는 문양의 사진이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4 - 남한산성] / ⓒ Pldx1)
어차피 청나라 군대는 속전속결을 작전으로 했으니 보급여건이 좋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지방군이 청군을 역으로 포위하고 남한산성의 보급로를 뚫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병력을 모아서 한 방향으로 공격했어야 했는데, 조선의 속오군 체제는 통합적인 지휘 체계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향토예비군인 속오군은 대부분 농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정규군을 가진 김자점은 병자호란이 끝나도록 싸우러 달려오지 않았습니다.
(사진: 남한산성(병자호란)을 그린 JTBC의 드라마 한 장면. 인조가 땅에 머리를 박는 장면은 역사적으로 허구지만, 국민들 사이에는 사실로 잘못 알려져 있다. [역사 남한산성 줄거리 4 - 남한산성] / ⓒ JTBC)
결국 병자호란 남한산성 줄거리는 인조의 항복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합니다. 그동안 주화파와 척화파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사이 지방의 중요지역은 청군이 점령하며 재기불능이 되어버렸습니다.
'삼전도'는 지금의 송파구에 있습니다. 삼전도(三田渡)의 한자는 섬이 아니라 배가 정박하는 '나루터'의 渡자입니다. 여기서 인조는 '삼배구고두례'를 올리고 항복하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머리를 박는 장면은 "지어낸 얘기"이지만, 역사에 남을 치욕을 당한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