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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 - 민족대표 34인의 석호필 박사와 제암리 학살사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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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 - 민족대표 34인의 석호필 박사와 제암리 학살사건

키스세븐지식 2017. 11. 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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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 - 민족대표 34인의 석호필 박사와 제암리 학살사건]

어떤 이들은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외국인 한 명을 더하여 민족대표 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민족대표 34인의 석호필로도 알려져 있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고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에 얽힌 석호필 박사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글의 순서]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


[엮인 글]

석호필 박사 - 프랭크 스코필드의 생애와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재단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


1919년 '3.1운동'은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사건입니다. 정치가가 잃은 나라를 국민이 나서서 되찾겠다고 투쟁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무능했지만, 국민은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조선인도 아니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34번째 민족대표로 알려진 '석호필' 박사입니다. 


사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로서 국립현충원에 묻힌 외국인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사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로서 국립현충원에 묻힌 외국인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 / ⓒ 국가보훈처)


민족대표 34인의 석호필은 원래 이름이 '프랭크 스코필드'였습니다. 그가 한국식 이름을 석호필(石虎弼)로 정한 것에는 깊인 뜻이 있습니다. 

처음엔 스코필드의 음을 따서 석호필(石好必. 반드시 좋아한다는 뜻)로 지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비참한 현실에 공감하고는 조선을 돕겠다는 의지로 虎弼(용맹하게 돕는다는 뜻)로 바꿔서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사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직접 찍은 3.1운동 당시의 사진. 해외에 조선 독립의 열망을 알리는 증거가 되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사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직접 찍은 3.1운동 당시의 사진. 해외에 조선 독립의 열망을 알리는 증거가 되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 / ⓒ Frank W. Scofield)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 조선에 온 프랭크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제약부에서 일하던 '이갑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갑성은 나중에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될 사람입니다. 

이갑성은 외국인이 알 수 없던 불행한 조선의 강제 병합을 얘기해 줬고, 석호필 박사는 함께 분통해 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로 했답니다. 


사진: 3.1운동 당시에 대기 중인 일본군. 일본은 은폐하려고 했지만 군대까지 동원된 만행이었음이 스코필드의 사진으로 증명되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사진: 3.1운동 당시에 대기 중인 일본군. 일본은 은폐하려고 했지만 군대까지 동원된 만행이었음이 스코필드의 사진으로 증명되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 / ⓒ Frank W. Scofield)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국에 대한 정보도 필요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석호필 박사는 국외의 정황을 파악해서 3.1운동의 시점과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고립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조선도 동의해서 합방을 한 것으로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3.1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진: 젊은 날의 프랭크 스코필드와 그의 통역관. 그는 3.1절 독립운동에 참여한 외국인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사진: 젊은 날의 프랭크 스코필드와 그의 통역관. 그는 3.1절 독립운동에 참여한 외국인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박사] / ⓒ Frank W. Scofield)


민족대표 33인 중 이갑성은 학생시위와의 연결고리가 되었고, 전단지를 뿌리며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동안 그는 밖에서 시위와 홍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프랭크 스코필드에게 이 상황을 사진으로 남겨 해외에 알려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석호필 박사는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후 석호필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까지 사진을 찍어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


3월 1일 일어난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파되어 일제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일제의 만행도 과격해졌는데, 그 중 하나가 제암리 학살사건입니다. 

1919년 3월 31일,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인 제암리에서는 장날에 모인 군중들이 만세운동을 펼쳤습니다. 이 만세운동은 유학,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밤마다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다가 주민 천여 명과 함께 일제의 관청을 부수었다고 합니다. 


사진: 석호필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고 해외에 이를 알렸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사진: 석호필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일제의 만행을 목격하고 해외에 이를 알렸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 / ⓒ 국가보훈처)


그러던 중 인근에서 '수촌리 학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촌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마을에 방화하여 대부분을 불타게 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 소식은 서울에까지 알려졌지만 일본은 사실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프랭크 스코필드와 선교사, 영국 공사관, 기자 등의 외국인들이 직접 확인하러 출발했습니다. 석호필 박사와 외국인들이 수촌리를 방문했을 때 또 하나의 슬픈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것이 제암리 학살사건이었습니다. 


사진: 교회에 감금하고 총격과 방화로 공격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그림. 경기도 화성시에서 기념관을 둘러보길 바란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사진: 교회에 감금하고 총격과 방화로 공격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그림. 경기도 화성시에서 기념관을 둘러보길 바란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 / ⓒ 경기도 화성시)


석호필 박사와 일행이 수촌리로 가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제암리 마을 주민들의 분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발생하였었습니다. 며칠 후 일본군은 제암리를 방문하여 "진압과정에서 과격한 폭력을 가한 것을 사과한다"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의 기회를 갖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군의 흉계였습니다. 처음부터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 제암리 학살사건의 시작입니다. 


사진: 제암리 학살사건 후 가족을 잃고 망연자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 석호필 박사와 일행은 객관적인 증거로 일제의 만행을 증명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사진: 제암리 학살사건 후 가족을 잃고 망연자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 석호필 박사와 일행은 객관적인 증거로 일제의 만행을 증명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 / ⓒ 국가보훈처)


일본군은 15세 이상의 마을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였습니다. 20여 명 이상의 남자들을 모은 후, 일본군 장교 하나가 교회에 들어가 기독교 교리에 대해 몇 마디 얘기를 잠간 나누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포위하고 대기하던 일본군들은 집중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교회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밖으로 나오는 자들도 사격을 받고 즉사하였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름을 부은 후 불을 질러 확인 학살까지 저질렀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윤보선 대통령과 함께하는 석호필 박사. 한국에 살며 한국인으로 민주주의 지지와 빈부격차 비판을 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사진: 윤보선 대통령과 함께하는 석호필 박사. 한국에 살며 한국인으로 민주주의 지지와 빈부격차 비판을 하였다. [제암리 학살사건과 프랭크 스코필드] / ⓒ newsis.com)


프랭크 스코필드와 외국인들은 급히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참담한 만행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석호필 박사는 3.1운동 때 그랬던 것처럼 이를 기록하여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물론 일본은 이런 사실은 완전히 부인하고 은폐를 시도했습니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이 사진과 사연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수원 잔악행위에 대한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민족대표 34인이었던 그가 없었다면 세계가 일본의 말만 믿고 주민들의 원통한 죽음으로 잊혔을 뻔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은 석호필 박사의 공을 높이 사서 외국인이지만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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