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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비슬산 사효굴 - 현풍 곽씨 네 아들의 사효자굴 이야기

2018. 6. 8.

[대구시 비슬산 사효굴 - 현풍 곽씨 네 아들의 사효자굴 이야기]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네 아들의 효행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구시 비슬산의 사효굴은 곽재우 장군의 형인 곽재훈의 네 아들에 대한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사효자굴이라고도 하는데, 효도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현풍 곽씨 네 효자 아들 이야기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은 왜군이 무서워하는 의병장이었습니다. 경남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서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한편 '곽재훈'이란 사람이 경북 대구 인근에 살았는데, '현풍 곽씨' 문중에 의하면 곽재우의 종형이라고 합니다.

사진: 한국관광공사의 곽재우 장군 동상 이미지(사진: 한국관광공사의 곽재우 장군 동상 이미지 [대구 달성군 비슬산 사효자굴에 대한 전설] / ⓒ kto.visitkorea.or.kr)


종형은 사촌형을 뜻합니다. 현풍 곽씨 문중의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 곽재훈은 병이 있어 피하지 못하고 대구 달성군 비슬산의 사찰인 '유가사' 인근으로 피난했다고 입니다. 유가사 인근의 산에는 굴들이 있어서 숨어 살 수 있었고, 여기가 지금의 사효굴 전설이 생긴 곳입니다.

사진: 대구 달성군 관광 홍보 이미지(사진: 대구 달성군 관광 홍보 이미지 [대구 달성군 비슬산 사효자굴에 대한 전설] / ⓒ Chanilim714)


곽재우의 종형 곽재훈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결, 청, 형, 호'라고 남아있는데, 이 아들들이 사효굴의 전설에서 아버지를 위해 죽은 효자들입니다. 이들은 병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대구 비슬산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현재의 주소는 달성군 유가면 양리 360입니다.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사효자굴의 네 아들

곽재훈은 '천망병'이란 것을 앓고 있었습니다. 천망병이란 기침병으로 기가 빠지는 병입니다. 계속된 기침으로 본인도 힘들겠지만, 문제는 주변을 지나던 왜군에게 발각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왜병들이 산을 지나는 중에 어디선가 기침소리가 들리니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문화재청의 임진왜란 전투 그림.(사진: 문화재청의 임진왜란 전투 그림. [현풍 곽씨 네 효자 아들 이야기] / ⓒ cha.go.kr)


왜병들이 지금의 대구시 비슬산 사효굴 쪽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네 아들들 바짝 긴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왜군들은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들어와서는 양민들을 학살하고 코와 귀를 베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군들은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고 굴 앞에 와 있었습니다.

사진: 일본의 귀무덤. 수많은 한국인의 귀와 코를 잘라가서 묻었다.(사진: 일본의 귀무덤. 수많은 한국인의 귀와 코를 잘라가서 묻었다. [현풍 곽씨 네 효자 아들 이야기] / ⓒ KENPEI)


왜병들이 굴에 들이닥쳐서 학살을 벌일 것을 두려워한 큰 아들이 먼저 사효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왜병들은 잔악하게 살인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또 기침소리가 굴 안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그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니 그대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일본 왜장은 잔인하게 사형제를 죽인 뒤, 남은 아버지를 살려 보냈다는 것이 사효굴의 전설이다.(사진: 일본 왜장은 잔인하게 사형제를 죽인 뒤, 남은 아버지를 살려 보냈다는 것이 사효굴의 전설이다. [현풍 곽씨 네 효자 아들 이야기] / ⓒ tonkati.me)


이번에는 작은 아들이 사효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병약한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한 희생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역시나 왜군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그래도 기침소리가 또 들리자 왜군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들어서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셋째 아들이 나갔고, 쓰러지면 넷째 아들이 나갔습니다.



대구 달성군 비슬산 사효자굴에 대한 전설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이 나오는데 왜병들은 인정도 없이 칼로 베어 죽여버렸습니다. 이렇게 사효굴의 네 효자는 목숨을 마쳤습니다. 이제 곽재훈만 남았습니다. 왜병이 나오라고 호통하니 병에 찌든 아버지가 힘들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왜군은 기이하여 사연을 물었습니다.

사진: 현풍 곽씨 문중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사효굴 효자 이야기.(사진: 현풍 곽씨 문중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사효굴 효자 이야기.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사효자굴의 네 아들] / ⓒ posan.kr)


그제야 네 효자 아들들이 아버지를 구하고자 목숨을 버려가며 희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장은 아버지의 등에 "차인효자지부후인물해"라는 패를 써서 걸어주며 살려 보냈습니다. "이 사람은 효자의 아버지이니 다음 사람들도 해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장마저도 사효굴의 효성에 감동한 것입니다.

사진: 사효자굴이 있는 곳의 지도 안내. 비슬산 유가사도 보인다.(사진: 사효자굴이 있는 곳의 지도 안내. 비슬산 유가사도 보인다.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사효자굴의 네 아들] / ⓒ map.naver.com)


왜장이 정말로 감복한 것인지, 왜군에게도 높은 자비심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사효굴의 네 효자 이야기는 소문을 타고 전설이 되었으며 '현풍곽씨 12정려각'에는 결, 청, 형, 호 네 아들이 사효자공으로 조정의 표창을 받았다는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진: 우리역사넷의 현풍곽씨 12정려각 이미지.(사진: 우리역사넷의 현풍곽씨 12정려각 이미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사효자굴의 네 아들] / ⓒ contents.history.go.kr)


또 다른 이야기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이 사효굴 이야기를 듣고 효행을 기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지금 대구시 비슬산 인근에는 사효자 묘소가 있는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882년 곽재훈의 9세 후손이 암벽에 사효굴이라는 글을 새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현풍 곽씨 문중 홈페이지에 공개된 사효굴의 이미지.(사진: 현풍 곽씨 문중 홈페이지에 공개된 사효굴의 이미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한 사효자굴의 네 아들] / ⓒ posan.kr)


그러나, 사효굴 전설로 왕의 '정려'를 받는 것이나 사효자비가 세워지는 것으로도 네 아들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해야 했던 곽재훈의 심정을 위로하기에는 부족할지 모릅니다. 더구나 살아서 잊지 못하고 견뎌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희생을 한 네 아들의 효성은 가족애입니다. 점점 각박해지는 현대에, 그들의 효성과 가족애는 깊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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