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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가 세계챔피언 되다 - 복싱선수 김성준

2018. 3. 28.

[소매치기가 세계챔피언 되다 - 복싱선수 김성준]

한국 프로 권투의 황금기는 1970 ~ 80년대였습니다. 이때 세계챔피언에 오른 복싱 선수 김성준은 큰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권투 선수 김성준은 한 때 소매치기로 먹고 살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드라마 같은 그의 일생을 쫓아가 봅니다. 




[글의 순서]

소매치기 세계 챔피언 김성준

비운의 복싱 선수 김성준



소매치기 세계 챔피언 김성준


1974년 WBA 밴텀급에서 '홍수환'이 복싱 세계챔피언이 되고, 1975년 '유제두'가 슈퍼웰터급 챔피언이 되면서 대한민국은 권투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1978년 WBC 라이트플라이급 복싱 세계챔피언 '김성준'이 탄생하며 매우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 복싱선수 김성준은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와 함께 과거 소매치기였다는 일화가 알려지며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사진: 경기 후 퉁퉁 부은 눈으로 사진에 찍힌 권투 선수 김성준.(사진: 경기 후 퉁퉁 부은 눈으로 사진에 찍힌 권투 선수 김성준. [비운의 복싱 선수 김성준] / ⓒ blog.daum.net/imjinkang)


1970년대 배고픈 후진국의 한국인은 시련을 극복하고 탄생한 세계챔피언들을 더욱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라도 느껴야 했던 국민적 자부심인 것입니다. 

세계챔피언 복싱 선수 김성준은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부유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실패 후 죽으면서 여섯 번이나 쫓겨나서 이사를 할 정도로 힘들어졌습니다. 


사진: 김성준과 양홍수의 권투 라이벌전 당시 화면.(사진: 김성준과 양홍수의 권투 라이벌전 당시 화면. [비운의 복싱 선수 김성준] / ⓒ 한국권투중흥기이교덕)


결국 열네 살 되는 해에 가출을 하고만 김성준은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 닦기를 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검은 세계에 빠져들어 국내최대 소매치기 조직인 김봉호파에서 소매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소매치기 기술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서민들을 울게 만드는 소매치기로 살았던 김성준이었습니다. 


사진: 소매치기였던 권투 선수 김성준의 사진.(사진: 소매치기였던 권투 선수 김성준의 사진. [비운의 복싱 선수 김성준] / ⓒ geojesiminnews.co.kr)


하루는 행상 아줌마의 돈 가방을 소매치기한 김성준이 반성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모았을 듯한 돈을 보며 양심이 찔려서 다시 갖다 주게 된 것입니다. 

그 후, 홍수환과 유제두에 의해 마침 전국적으로 권투 열풍이 불고, 한 선배가 권투를 해보라는 권유를 하면서 복싱 선수 김성준의 새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1975년 데뷔 이후에도 한 동안은 그저 그런 복서였지만, 결국 한국챔피언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비운의 복싱 선수 김성준


소매치기 복싱 선수 김성준은 한국챔피언에 오른 뒤, 자수하고 과거를 청산할까 했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괜히 과거가 드러나면 이미지가 나빠질 것인데다가, 범죄 조직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후원해 주던 조직원을 숨겨 주게 되었고, 챔피언이 되기 전의 소매치기 경력이 드러나며 김성준은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사진: 세계챔피언 김성준이 탄생하 보라싱과의 챔피언전.(사진: 세계챔피언 김성준이 탄생하 보라싱과의 챔피언전. [소매치기 세계 챔피언 김성준] / ⓒ KBS)


다행히도 권투 선배들은 그의 실력을 아까워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검사와 권투에만 전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소매치기 복싱 선수 김성준은 세계챔피언 김성준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978년 '보라싱'과의 대결에서 챔피언벨트를 따낸 것입니다. 그리고 3차 방어전까지 세계챔피언 김성준의 명성은 쟁쟁했습니다. 


사진: 복싱 선수 김성준의 3차 방어전 헥토르와의 경기.(사진: 복싱 선수 김성준의 3차 방어전 헥토르와의 경기. [소매치기 세계 챔피언 김성준] / ⓒ KBS)헥토르


1980년, 김성준은 일본 경기에서 편파 판정을 받으며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3차 방어전을 한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며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있었던 일입니다. 

1982년 은퇴 후에는 이민을 가보기도 하고 사업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하며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세상은 복싱 링보다도 더 처절하고 냉혹한 곳이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3차 방어전에서 화면에 찍힌 권투선수 김성준의 모습.(사진: 3차 방어전에서 화면에 찍힌 권투선수 김성준의 모습. [소매치기 세계 챔피언 김성준] / ⓒ KBS)


사랑하던 여인마저 떠나간 후, 1989년 복싱 선수 김성준은 6층 건물 옥상에서 투신을 했습니다. "마지막 사랑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는 유서를 남긴 채 겨우 36세의 나이로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소매치기 김성준, 복싱선수 김성준, 세계챔피언 김성준은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저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불우 청소년에게 작은 희망이 되겠다"던 약속을 마지막에는 지키지 못하고, 대한민국 다섯 번째 세계챔피언은 사라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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