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남영동과 6월 항쟁]
1980년대의 추억을 현대의 눈으로 다시 보는 TV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를 추억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이한열 사건과 더불어 한 청년의 죽음을 통해 현재의 민주화를 쟁취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글의 순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고문사건 은폐
박종철 사건과 6월 항쟁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 당한 후, 약 20년 동안 독재 아래에 살던 국민들은 민주주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생긴 국민은 전과 달라졌습니다. 박정희 시대까지만 해도 납치, 폭행에 아무 말을 못하던 국민들이 이번에는 항의를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사진: 박종철은 선배 박종운을 지켜주다가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 그러나, 그 선배는 지금 한나라당에 들어간 후 극우 편향 글을 쓰고 있다.)
1986년 `건대항쟁` 때만해도 쿠데타 세력은 국민의 저항을 얕잡아봤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대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시위를 하도록 함정에 빠트린 후, 대량 구속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도 보수당이 정권을 잡으면 빨갱이 논란을 만들어서 정치에 이용해 먹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방법이 극에 달해서 주기적으로 공안사건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사진: 조작사건인 민청학련 사건을 빨갱이사건으로 보도하는 당시 신문 / ⓒ 조선일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을 터트리기 위해, `박종운`을 잡으려고 `박종철`을 연행하였습니다.
1987년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종철은 선배 박종운의 위치를 밝히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텼는데, 각종 고문을 당해 초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사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던 남영동 분실 509호. 지금은 기념관람이 이루어지고 있다. / ⓒ Jjw)
결국 1월 14일 물고문에 의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민언론은 빨갱이가 고문 받다가 죽었다는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민주화된 현재 우리가 정부의 잘못을 꾸짖을 수 있는 것은 구. 민주당의 김근태 등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민주화는 받아 누리면서도 이들을 부정하는 국민이 아직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1987년 고문사건 은폐
박정희 시대 때처럼 파묻혔을지도 모를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우연한 일들이 겹쳐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 중 목이 눌려서 사망했지만, 경찰은 은폐하여 숨기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이 검찰에 전해져서 오가는 얘기를 기자가 우연히 듣고는 기사로 알린 것입니다.
(사진: 박종철이 선배 박종운을 위해 사망한 당시의 남영동 대공분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건물. / ⓒ Jjw)
비밀로 하는 것에 실패한 경찰은 공식입장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말해서 오히려 국민들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피해자가 발생해도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민주화가 뭔지 슬슬 알게 되는 시기였으니, 발표를 비웃을 뿐 안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후 추모대회를 열려고 하자 경찰은 갑자기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는 또 다른 일화도 있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 `정호용`은 절대 경찰이 폭력고문을 했을 리가 없다며 "어떻게 사람을 때리겠느냐"고 두둔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정호용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하고, 민자당(현. 자유한국당)에서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놀랍게도 계속 뽑아주는 지역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천주교사제단이 박종철 군의 영정을 들고 가고 있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진실 폭로에 큰 공로를 세웠다. / ⓒ 경향신문)
고문 경찰은 급히 시체를 화장해서 증거를 숨기기로 했습니다. 수사관들은 법 절차적인 순서에 의해 검찰의 `최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에는 경찰의 힘이 검찰보다 셌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최환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시체보존 처리를 해버렸습니다.
이 결정적인 일로 인해 결국 부검까지 하게 되어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사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2018년 개봉했다. 영화 포스터 / ⓒ 영화 1987)
검사 최환은 원래 공안검사였지만, 당시 경찰의 힘 아래에서 눌려 지내던 검찰의 반격을 위해 박종철 사건을 덮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당시 최환의 지휘 아래에서 박종철 사건을 수사한 `안상수`는 오히려 은폐 축소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이었으며 지금도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계속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박종철 사건과 6월 항쟁
부검을 통해서 고문이 사실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후, 경찰은 비난을 받고 내부 징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축소 은폐를 했음이 다시 터지면서 또 한 번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치안감 `박처원`의 지휘 아래 있던 수사관 2명이 모든 잘못을 책임지기로 하고 거액의 보상금을 받은 것입니다.
박처원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도 10억을 들여 도피생활을 도운 사람입니다.
(사진: 박종철 군의 아버지가 재판을 참관한 뒤 적은 자필 문서의 일부. 아래 링크에서 크게 볼 수 있다. /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은폐, 축소 수사의 진실도 우연하게 드러났습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구속된 수사관들이 민주사건으로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의 옆방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이부영은 외부에 알리도록 도움을 청했고, 양심적인 교도관들이 도와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부영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입니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그렇게 목숨 바쳐서 지켜준 박종철 선배 박종운은 한나당에 들어가서 보수주의자가 되었으며, 지금도 극우 편향 글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항의와 시위를 했다. 정부는 전투경찰을 동원해서 이를 막았다. / ⓒ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 측은 어떠한 잘못에도 다시 권력을 잡는 끈질김을 보입니다.
당시 최초 은폐수사를 맡았던 `신창언`은 민자당(현. 자유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헌법재판관을 했고, 당시 은폐를 알고도 수사를 진행했던 `박상옥`은 구. 새누리당의 지지를 받아 대법관 후보자에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안상수까지 친다면 보수당은 독재정권을 그대로 이어받은 당인 셈입니다.
(사진: 고문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 ⓒ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결국 축소되어 영원히 묻힐 뻔했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이를 본 국민들은 큰 충격과 함께 저항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빨갱이 하나 죽은 사건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던 보수적인 국민들 중에는 아직도 경찰을 감싸는 사람이 많지만, 진보적인 국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습니다.
(사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시위에 의해 이한열 사망사건으로 이어지며 결국 1987년 6월 항쟁이 되었다. / ⓒ 연합뉴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후, 그해 6월에는 대규모 국민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번진 항쟁은 6월 항쟁의 시작이 되었고, 마침내 독재정부가 직접민주주의 투표와 각종 개혁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독재를 무너트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나라는 한국이 아시아 최초의 국가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