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관 이명기(초상화가)와 카메라 옵스큐라의 조선 사실주의]
조선 시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에서만은 이들보다도 높이 평가받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산관 이명기입니다. 이명기의 아버지 이종수 등 가족들도 그림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이명기가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을 이용했다는 주장이 있어서 그에 대해 알아봅니다.
[글의 순서]
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와 뜻
이명기와 카메라 옵스큐라
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
화산관 '이명기'는 조선 후기인 1700년대 말의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였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조선 최고의 화가로 알고 있는 '김홍도'와 '신윤복'도 살고 있던 시대였으며, 이명기는 김홍도와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왕의 '어진'과 권세 있는 사대부의 초상화를 그릴 때, 항상 첫 번째 추천되는 사람이 이명기였다고 합니다.
(사진: 왼쪽 그림은 채제공의 초상화 중 얼굴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조선의 사실주의 화풍을 볼 수 있다. [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 / @ 이명기)
화산관 이명기의 집안도 유명 화원들입니다. 이명기의 아버지 이종수와 동생 뿐 아니라, 장인까지 화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명기의 유명 작품으로는 '채제공', '강세황'의 초상화 등이 있으며, 이명기가 얼굴을 그린 후 김홍도가 몸을 그린 작품인 '서직수' 초상화, 산수화로는 '송하독서도' 등이 있습니다.
(사진: 이명기의 송하독서도. 산수화는 김홍도의 영향도 느껴진다. [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 / @ 이명기 / 편집 www.kiss7.kr)
화산관 이명기가 이렇듯 대가로 손꼽히는 것은 너무도 섬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물도 이외의 산수화 등에서는 이명기만의 특색이 없어서 현대에는 김홍도, 신윤복에 비해 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사실주의 화풍을 정착시킨 공로는 인정할 만 합니다.
(사진: 73세의 채제공과 64세의 채제공. 그림을 그린 날의 기분까지 얼굴에 나타나 있다. [초상화가 이명기의 생애] / @ 이명기)
중인 신분의 이명기는 화원이었지만 경상도에서 가장 큰 역참인 '장수도'에서 '찰방'을 지냈습니다. 김홍도도 안동의 역장을 했으니 정조가 매우 아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참의 찰방은 종6품으로 '현감' 아래에 있는 정식 관식입니다. 이명기는 신녕 고을의 '화산'의 경치를 좋아해서 호를 "화산관"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와 뜻
그런데 붓으로 동양적인 표현만 하던 조선시대에 이명기가 이토록 사실적인 묘사를 한 것은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 때문이라는 연구가 나와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이명기의 아버지 이종수도 화원인 만큼 그림 솜씨를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너무나 섬세한 이명기의 초상화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사진: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 설명. 어릴 때 한 번씩은 다 봤을 법한 설명이다.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와 뜻] / @ Fizyka / 편집 www.kiss7.kr)
'카메라 옵스큐라'란 작은 구멍을 통해 물체의 상이 맺히게 하는 기법입니다. 초등학생 시절 교과서에 나왔던 "구멍을 통해 보는 촛불의 모습"도 이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중세 서양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으나, 그 이전에도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가 발견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진: 1430년대의 서양 사실주의.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이라는 작품.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와 뜻] / @ 얀 반 에이크)
화산관 이명기의 작품이 이전의 조선 화풍과 너무 다른 이유는 서양의 화풍이 전래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의 카메라도 사실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와 같습니다. 작은 렌즈를 통해 들어온 바깥 풍경이 필름에 맺히는 현상을 이용하여 저장하는 방식이니 말입니다.
(사진: 17세기 서양인들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를 이용한 그림 그리기. 다시 화가들의 영업비밀일지도 모른다.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와 뜻] / @ Athanasius Kircher)
카메라의 어원은 "방"입니다. 그리고 옵스큐라의 뜻은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어두운 방에 구멍을 뚫은 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따라 그린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캄캄하게 방을 만든 뒤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게 하면, 바깥 풍경이 방 안에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명기와 카메라 옵스큐라
조선 후기의 명화가인 화산관 이명기도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이전의 조선과 달리 사실주의가 매우 강렬하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의 저서에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가 적혀 있으니, 가능성이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고품질 렌즈가 없어서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진: 이명기와 김홍도의 합작품인 서직수의 초상화. 조선 후기 미술 중 초상화의 백미로 손꼽힌다. [이명기와 카메라 옵스큐라] / @ 이명기)
화산관 이명기가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두 개의 방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한쪽은 인물이 앉아서 매우 밝은 빛을 받고 있어야 하고, 한 쪽은 빛을 차단해서 구멍만 뚫어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멍 앞에 종이를 세워 설치합니다. 이제, 종이에 비춰지는 모습을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됩니다.
(사진: 근대식 카메라 옵스큐라 방법. 현대의 카메라 원리도 결국은 비슷한 것이다. [이명기와 카메라 옵스큐라] / @ Meggar)
화산관 이명기의 아버지 이종수가 화원으로 있으면서 이명기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화가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병자호란 이후의 북학파와 후기의 실학에서 서양 기술이 많이 전래되어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까지 습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그의 밑그림 도구도 붓이 아니라 연필같은 흑연이었습니다.
(사진: 연필같은 흑연으로 스케치가 남아 있는 모습. 동양화의 화가들도 밑그림을 그린 후 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명기와 카메라 옵스큐라] / @ 이명기)
화산관 이명기의 초상화를 보면 섬세한 선의 흐름 뿐 아니라 명암을 이용한 그림자와 원근법까지 표현되고 있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단점은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림자까지 섬세히 그렸으니 어쩌면 모든 것이 이명기의 실력일지도 모릅니다. 화산관 이명기는 조선 후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힐 만 하며, 궁금증을 발생시키는 그의 그림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흥미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엮인 글]
르네상스 사실주의 - 아르놀피니의 결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