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드골과 정치인 드골 - 프랑스 샤를 드골의 사생활과 성격]
프랑스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하면 단연 드 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샤를 드골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근검과 원칙"입니다. 고집스러운 장군과 정치인이라는 외면과 함께, 샤를 드 골의 딸 안느에 대한 이야기는 강한 부성애의 내면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 장군 샤를 드 골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에 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각국마다 유명 장군들이 탄생하는데, 독일은 `롬멜`, 영국은 `몽고메리`, 미국은 `아이젠하워`, 프랑스는 `드 골` 장군을 뽑을 수 있습니다.
이 중 아이젠하워와 드 골은 대통령에까지 오르며 인기가 막강했습니다.
(사진: 제2차 세계대전의 유명 지휘관들. 왼쪽부터 롬멜, 몽고메리, 아이젠하워, 드골의 사진이다. [프랑스 장군 샤를 드 골] / ⓒ 편집 www.kiss7.kr)
샤를 드 골은 1890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 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입니다.
그의 집안에 역사가와 작가가 많았던 영향으로 아버지는 철학과 문학을 가르치려 했으나, 어린 시절의 드 골의 성격은 군사학에 관심이 많아서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사진: 프랑스의 대통령이며 장군이었던 샤를 드골의 일대기. 머리가 긴 소년의 사진도 드 골의 어린 시절이다. [프랑스 장군 샤를 드 골] / ⓒ bridgemanimages.com)
제1차 세계대전 때는 10개월 동안 71만 명의 군인이 전사했던 '베르됭 전투'에서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사를 드 골은 196cm의 키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5번이나 탈출을 하다가 잡히곤 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가장 아끼는 샤를 드 골의 딸 안느가 태어났습니다.
(사진: 기갑사단 지휘관으로 활약할 때의 샤를 드골 장군. 독일의 전격전 만큼 드 골도 기동전을 주장하였다. [프랑스 장군 샤를 드 골] / ⓒ 2eguerremondiale.fr)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과 휴전하는 것을 반대하여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는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영국에서 프랑스 내의 '레지스탕스'를 지원하며 정치인으로 거듭났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샤를 드 골은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샤를 드 골이라는 정치인
샤를 드 골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계처럼 인간미 없는 원칙주의 드 골의 성격은 매우 유명합니다.
'자유 프랑스'라는 망명정부를 이끌고 영국에 있었는데, 영국의 '처칠'은 드 골과 얘기하기를 꺼려했고, 미국의 '루즈벨트'는 드 골을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방 유명 정치가들. 왼쪽부터 처칠, 루즈벨트, 드 골 대통령이다. [샤를 드 골이라는 정치인] / ⓒ 편집 www.kiss7.kr)
샤를 드 골이 본격적으로 국민 영웅이 된 것은 1944년 프랑스를 되찾으며 파리로 입성할 때, 저항군의 대표자격으로 국민 앞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70% 이상을 차지했던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었지만, 드 골에 의해 숙청되었습니다.
(사진: 나치 독일에 프랑스가 점령 당했을 때 레지스탕스의 사진. 당시 프랑스 광복군의 70% 이상이 프랑스 공산주의 소속이였다. [샤를 드 골이라는 정치인] / ⓒ 원작자를 알 수 없음)
독일군에 점령됐던 프랑스에서는 애국주의 작용으로 샤를 드 골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임시 정부의 최고직을 맡으면서 확고해졌습니다.
한편, 나치 독일에 부역했던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아주 모범적이었는데, 비공식적으로 11만 건에 달하는 재판을 했으니 우리나라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사진: 나치 독일에 부역한 자들에게 가혹하게 처벌했던 프랑스의 사례. 삭발 후 동네 돌림을 받는 것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샤를 드 골이라는 정치인] / ⓒ 편집 www.kiss7.kr)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장군은 우리에게 반민족 반역행위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친일세력과 결탁하여 '반민특위'까지 방해한 이승만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체로의 보수우익은 민족주의지만, 한국의 보수우익만은 민족주의를 배척하는 해괴한 현상이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첫 정부는 진보적인 제4공화국이 맡았습니다.
1948년, 샤를 드 골의 딸 안느가 다운증후군을 앓다가 죽었고, 드 골도 잠시 정치계를 떠났지만, 보수주의자였던 드골은 정부와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결국 1959년 제4공화국을 무너트리고 드골이 집권합니다.
(사진: 파리를 회복한 후 개선문을 통해 들어서는 샤를 드골. 이때의 명 연설로 드 골은 프랑스인들의 인기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 ⓒ lasegundaguerra.com)
그는 1959년부터 1969년까지 10년이나 독재정치를 했습니다. 드 골의 성격은 매우 깐깐하고 고집스러워서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드 골은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았고, 드 골의 딸 `안느`가 다운증후군 환자였기에 시작된 정신지체에 대한 기부활동도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사진: 각국 정상들과의 회담. 그러나 샤를 드 골은 프랑스 국익 우선주의였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을 보였기에 미움받는 대상이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 ⓒ britannica.com)
샤를 드 골의 정치노선은 미국와 영국에 휘둘리지 않고 프랑스만의 이익을 위한 독자노선이었습니다. 또한 높은 지지율을 이용한 여론투표를 자주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의 독재에 대해 철학자 사르트르 등의 지식인들은 드 골의 정치를 비난했고, 68항쟁에 이어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배하며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말년의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의 모습. TV에서 연설을 하는 등 국민 인기 관리에 재능을 보인 정치가이다. 최근에는 비판의 양면도 드러났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 ⓒ monnaiedeparis.fr)
강력한 보수우파 정치인이었으나, 샤를 드 골의 성격이 원래 검소하여 우리나라처럼 기득권과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프랑스 대통령으로 지내고 퇴임한 후에도 드 골은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1년 후 병으로 사망할 때 샤를 드 골은 딸 안느의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원칙주의의 내정한 정치인이지만, 결국은 아버지로서 딸의 곁으로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