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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

2017. 3. 18.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

역사에 기록된 최고의 명의라면 누구나 허준을 뽑을 것입니다. 그런데 침과 뜸 부분에서의 명의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조선 제일침이라 불리는 허임입니다. 상민으로 관직에 오른 유명한 발명가로 장영실이 있는데, 허임도 상민에서 의술로 벼슬에 오른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침술 의원이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최고의 침술로 인정받은 허임의 삶을 얘기해 봅니다.




[이글의 순서]

1.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

2.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

3.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은 한국인이라면 어린 아이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동의보감'은 1610년 광해군 때 금속활자로 제작된 의학서입니다. 한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동양을 대표하는 최고의 의학 서적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동의보감은 사상의학 등 철학적 연구 이외에도 민간요법 등 임상학적인 연구도 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약재를 이용한 약첩에 대한 집대성도 있지만, 뜸, 침을 이용한 치료 연구도 담겨 있습니다. 


사진: 허준이 기록해 놓은 경혈자리가 적힌 책. 조선 제일침의로 유명한 허임은 허준도 인정한 침의 대가이다.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사진: 허준이 기록해 놓은 경혈자리가 적힌 책. 조선 제일침의로 유명한 허임은 허준도 인정한 침의 대가이다.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 / ⓒ Jocelyndurrey)


그런데... 최고의 명의인 허준은 침을 놓는 의원이 아니라 약첩을 쓰는 의원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침을 놓았다는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선조가 편두통이 심해서 허준에게 침을 맞는 것은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허준은 "자신은 침을 잘 모른다며 침에 대해서는 '허임'의 말이 옳다"고 할 정도로, 30대의 조선제일침 허임을 50대의 허준도 인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기록에는 허준은 병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 자리를 잡고 허임은 침을 놓았다고 합니다. 


사진: 드라마 허준의 방송 캡처. 선조와 광해군 때 허임은 궁궐의 어의로서, 침술로 왕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사진: 드라마 허준의 방송 캡처. 선조와 광해군 때 허임은 궁궐의 어의로서, 침술로 왕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명의 허준과 조선제일침 허임] / ⓒ MBC드라마 허준 캡처)


허준과 허임의 생존 시기는 비슷합니다. 광해군 시기에 약 40년의 차이를 두고 조선 최고의 명의와 조선 제일의 침구가가 활약했던 것입니다. 침구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는데, 허준이 경혈을 연구하는 경혈고증파라면, 허임은 침을 잘 놓는 기법을 연구한 수법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준이 동양의학의 대가임은 분명하고 동의보감에도 꼼꼼히 침의 혈자리를 기록해 두었으나, 실증적인 조선제일침은 허임이라고 합니다. 특히 허임의 보사법은 침을 놓는 비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진: 인체는 경혈이 있어서 이 곳에 침과 뜸을 놓으면 병세의 호전과 치료로서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사진: 인체는 경혈이 있어서 이 곳에 침과 뜸을 놓으면 병세의 호전과 치료로서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 / ⓒ chpgarcia와 Sabine Felidae)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


조선제일침 허임은 1570년에 태어나 선조와 광해군, 인조 시대를 살다 갔습니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60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허임은 장영실처럼 상민 출신입니다. 장영실이나 허임처럼 출신이 양반가문이 아닌 경우엔 사망 연도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부터 상민은 아니었고, 7대조 조상은 문신인 '허조'였습니다. 세종 때 벼슬을 지냈으나, 세조가 어린 단종을 폐위하자 일어난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사진: 드라마 공주의 남자 방송 캡처. 나이 어린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건네주고 있다. 단종이 폐위되며 일어난 사건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사진: 드라마 공주의 남자 방송 캡처. 나이 어린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게 옥쇄를 건네주고 있다. 단종이 폐위되며 일어난 사건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 / ⓒ KBS드라마 공주의 남자 캡처)


허임의 아버지는 관노였습니다. 악기를 잘 다뤄서 악공으로도 일했다고 하는데, 관노란 옛날 관청의 노비를 말합니다. 허임의 어머니는 양반 집안의 사비였습니다. 사비 역시 개인에 소속된 노비이니 양쪽이 모두 천민인 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제일침으로 허임이 성장했나... 거기에는 어릴 적에 부모가 아파서 그 병을 치료하고자 스스로 침을 배웠다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허임의 침술은 침의 방법에 대한 효능을 경험적으로 연구하여, 유교시대에 관념적으로만 의학을 대하던 다른 의원들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진: 허임은 침을 놓는 방법과 효능을 실험하고 경험하므로서 스스로 침술의 완성도를 높여 침구경험방이라는 의학저서를 남겼다.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사진: 허임은 침을 놓는 방법과 효능을 실험하고 경험하므로서 스스로 침술의 완성도를 높여 침구경험방이라는 의학저서를 남겼다. [조선제일침 허임의 삶] / ⓒ Kyle Hunter)


침과 뜸을 잘 놓는 의원으로 소문이 나서 선조 때 입궐한 허임은 20여 년간 의원을 했습니다. 선조는 당 시대의 최고 의원이라고 표현했고, 광해군은 하늘이 내려준 인재라고도 했답니다. 특히 광해군은 허임을 매우 아껴서 벼슬을 높여 주고자 했으나, 대신들이 신분이 미천하다하여 반대를 했었습니다. 군수직을 주려고 하자 반대하여 관리직에 해당하는 녹봉으로 대신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제일침 허임은 결국 목사직을 받는데, 이 역시도 반대가 심하여 부사까지만 올랐습니다. 다만 광해군 말년에는 군왕의 질병을 함부로 말한 잘못으로 쫓겨났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합니다. 


사진: 허임의 기념비. 천민 출신으로 관직을 받은 의원이며 후에 부사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사진: 허임의 기념비. 천민 출신으로 관직을 받은 의원이며 후에 부사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조선제일침 허임 - 허준도 인정한 침의 명의 허임] / ⓒ heoim.net)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


허임은 의외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습니다. 허준이 다방면에 효과적인 의술 기록을 남긴 반면, 허임은 한 분야에서만 특출한 발전을 이룬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허임의 의술은 같은 침을 놓더라도 강약과 횟수를 두어 놓았다고 합니다. 한 번에 놓을 침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피부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제일침 허임은 침 외에도 뜸분야에서도 조선제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뜸은 피부까지 타들어가게 하는 보법과 그 전에 꺼버리는 사법이 있는데, 허임은 보사법에 능통한 의원이었다고 합니다. 제자로는 김중백과 최유태가 있습니다. 


사진: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 현대에도 허임의 업적을 기리고 침과 뜸의 효능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사진: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의 홈페이지. 현대에도 허임의 업적을 기리고 침과 뜸의 효능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 / ⓒ heoim.net)


조선제일침 허임의 저서로는 '침구경험방', '동의문견방'이 세계적인 의학서로 유명합니다. 1700년대에는 조선을 오가던 한 일본인이 조선 의원들의 침술에 놀라서 침구경험방을 가져다가 일본어로 출간했습니다. 

또한 1800년대 말에는 청나라에서 '침구집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이 허임의 침구경험방을 거의 표절했을 정도입니다. 동양 삼국에서 모두 인정받는 침술이었던 것입니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은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허임의 후손이 발견하여 보관 중이라는 서책과 도자기. 조선제일침 허임의 의학서인 침구경험방은 조선, 중국, 일본에서 인정받는 책이었다.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사진: 허임의 후손이 발견하여 보관 중이라는 서책과 도자기. 조선제일침 허임의 의학서인 침구경험방은 조선, 중국, 일본에서 인정받는 책이었다. [허임의 일화와 침구경험방] / ⓒ heoim.net)


허임이 지방에서 은거할 때, 조정에서 불러도 오지 않고 고집을 부린 적이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신분 낮은 허임을 괘씸하게 여겨서 벌을 주자는 간청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신분의 고하를 중요시하지 않고 재능으로 아꼈던 광해군은 이런 일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포상금으로 계속 지급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조선제일침 허임의 의술은 관념적인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경험과 실험으로 연구했기에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조선 의술은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얽매어 문헌에만 집착하고 경험적인 연구를 소홀히 했으므로, 허임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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