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의 명필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은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글씨가 명필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매국노 이완용의 글씨가 독립문 현판으로 붙을 수 있었을까요? 독립문과 독립협회에 얽힌 사연을 쫓아가 봅니다.
[이글의 순서]
1.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
2. 명필 매국노 이완용
3. 독립문의 진실
독립문 현판의 이완용 글씨
서울시 서대문구에는 독립문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개선문 같은 형태인데, 독립문의 건립연도는 1897년 전후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버젓이 "독립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과 태극기까지 새겨져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철거되지 않았습니다.
독립문 현판이 이완용의 글씨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일제가 '고적'(유물)으로 등록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등 관리를 한 것만은 맞습니다.
(사진: 이완용이 썼다는 독립문의 현판. 아치형의 문 위에 현판이 보인다. 아래는 현판을 화대한 모습. 한 면은 한글, 한 면은 한자로 되어 있다. [독립문 현판의 이완용 글씨] / ⓒ TFurban)
인근에는 '서대문형무소'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던 곳인데, 독립문을 보며 그들이 더 꿋꿋이 견뎌 냈는지도 모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볼 수 있는 태극기가 새겨진 건축물이니 말입니다. 그런 독립문 현판이 이완용의 글씨라니 한편으로는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
을사오적인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완용' 중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첫 번째로 떠올리는 매국노가 이완용입니다. 여기에는 독립문에 얽힌 사연이 있습니다.
(사진: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생을 했던 서대문형무소 전경. 가까운 곳에 독립문이 있다.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과 서대문 형무소] / ⓒ WaffenSS)
독립문은 1979년 성산대로를 건설하며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원래는 70미터 정도 떨어진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진이 조선에 올 때 맞이하던 장소입니다.
여기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당시의 "독립"이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거세지면서 청나라와 친청파인 명성황후는 이들에게 눈엣가시 같았습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친일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진: 왼쪽은 철거 전의 영은문 모습. 현재도 기둥은 남아 있다. 오른쪽은 철거된 영은문 지역에 세워진 독립문의 모습.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과 조설말기] / ⓒ 기록사진)
일본은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뒤,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의 제1조에서 일본이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중국에 종속되지 말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립문 건설 당시 이완용은 친미파였지만, 친청파를 견제하려는 것은 같았으므로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완용은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이었으며 제2대 회장이었고, 독립문 운영자금의 1/5을 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진: 1904년의 독립문.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던 것이 영은문이다. 이 근처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의 명필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 ⓒ Angus Hamilton)
명필 매국노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
고종황제 때 세워진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것에 반대 의견이 있기도 합니다. 조선 말 문신인 '김가진'의 글씨라는 것인데, 김가진도 독립협회 초기 멤버이며 창덕궁의 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발간된 당시 신문기사에 이완용이 거론되므로 이완용이 쓴 것에 좀 더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김가진도 명필로 유명했지만, 이완용은 당시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약간의 흘림이 있는 행서와 곡선 위주의 초서를 매우 잘 썼다고 합니다.
(사진: 위쪽 사진들은 을사오적의 사진이다.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아래쪽은 친일내각이 영친왕과 찍은 사진이다. [명필 매국노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 / ⓒ 기록사진. 편집 www.kiss7.kr)
이완용은 당시 세도가 '이호준'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전라도를 모함하려는 자들 때문에 호남출신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며, 실제 고향은 현재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입니다.
한문학자이여 서예가인 명필 '이용희'에게 학문을 배웠고 25세에 병과에 급제하여 입궐하였습니다. 이완용의 글 솜씨는 궁내에 소문이 퍼지면서 서사관에 오르게 되었고 실제로 여러 현판을 썼습니다. 그러니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것은 반청파이며 독립협회 위원장으로서 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사진: 행서와 초서의 비교 이미지. 오른쪽은 이완용의 행서이며 왼쪽은 유각의 초서이다. 행서, 초서란 한자를 쓰는 필체나 캘리그래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완용의 독립문 현판] / ⓒ 자료화면)
이완용이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친미파, 때로는 친러파였다가 친일파로 변신하였기에 외세론자는 분명하며, 이익을 위해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후 귀족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다 죽었지만, 그의 아들 이승구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그 자손 중엔 자결한 이도 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친일파 매국노였지만, 사실 일본어는 할 줄 몰랐고 영어를 잘해서 영어가 가능한 이또오 히로부미같은 인물들과 친했었습니다.
(사진: 1925년 당시의 독립문. 일제가 관리를 했다고는 하나 철거하지 않고 버려졌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과 을사오적] / ⓒ Michael Sean Gallagher)
이완용의 성품은 주색잡기를 밝히지 않으며 검소하고 이성적이며 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근처에 벼락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며 조선에 왔던 미국인의 표현에 의하면 "기계적"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말년에는 부동산을 사들이며 사치를 했는데, 갑부 1위 민영환에 이어 조선 2위의 재산가가 되었습니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로 명필이었다고 하지만, 그 글씨는 고서예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합니다. 거래도 거의 없으며 거래가 된다고 해도 50만 원 정도인데, 백범 김구의 서예작품이 1500만 원 이상에 거래되는 것과 비교가 됩니다.
(사진: 1955년 경의 독립문 근처. 경전차가 다니는 길에는 전기줄이 얽혔고, 도로에는 군용트럭이 다녔다.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의 명필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 ⓒ D. E. Grenier)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의 사연
조선 말기는 그야말로 혼란스러웠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고종은 친분이 있는 자들을 위주로 정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지만, 10년 뒤인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고 1897년 대한제국을 건국하며 고종은 황제가 되었습니다.
개혁이 이루어지자 미국으로 피신했던 서재필이 귀국하며 1896년 '독립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주장한 것이 독립문의 건립이었습니다. 처음엔 고종의 지원도 받고 수구파와 외세파가 다 참여했으니 국가적으로 추진한 사업이었습니다.
(사진: 1897년 4월에 발행된 독립신문의 모습. 한글판 외에도 영문판도 있었다. 서재필이 주도하여 창간되었으며, 이 신문에서 독립문 건립이 주장되었다.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의 사연] / ⓒ 서재필, 윤치호)
독립협회는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자는 단체였으며, 동시에 고위관료들의 친목모임이기도 했습니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맡을 정도로 이완용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꺼질 듯한 국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권력 다툼은 더욱 치열했습니다.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친청파가 싸움을 벌였고, 고종황제가 황제권강화를 추진하자 권력집중에 불만을 가진 세력도 많았습니다. 고종황제 편에 섰던 사람들은 빠져나가고 외세파와 정부 실책을 비판하는 세력만 독립협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97년 전후로 독립문이 세워졌습니다.
(사진: LG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는 서울 이벤트에 제출된 사진. 과거의 독립문과 현대의 독립문은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의 진실] / ⓒ LG전자)
비록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1905년의 '을사늑약', 1910년의 '경술국치'가 있기 훨씬 전의 일이며, 당시만 해도 이완용은 '송병준' 등의 일진회에서 주장하던 "자발적인 일본과의 합방"에 동의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변절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기 전까지 이완용은, 명성황후에게 충성을 고하다가 미국에 붙었다가 일본으로 전향하는 변화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고종황제를 밀어내고 공화제를 추진 중이라는 밀고를 받아서 1898년 해체되게 됩니다.
(사진: 현재의 독립문의 모습. 인근에 성산대로가 지나고 있어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앞에 영은문의 두 기둥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의 명필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 ⓒ Daum.net)
현대의 우리는 "독립"이라는 글자 때문에 일제에 맞섰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독립문은 복잡한 시대혼란과 권력다툼 속에서 세워진 "중국반대" 건축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주적인 국가를 기원하며 독립협회와 독립문 건립을 지지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끌어오기 위해 중국을 내쫓는 목적으로 독립문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국민의 염원을 이용해먹으며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하는 형태는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이 왜 현명해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