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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

키스 키스세븐 2016. 12. 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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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장 앙리 뒤낭'은 가난한 자, 어려운 자를 돕기 위한 국제적십자를 창시한 사람입니다. 이익을 쫓는 사업가였다가 구호와 봉사를 위한 헌신의 삶을 살게 된 그의 인생은, 적십자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인류 사랑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앙리 뒤낭


치열한 전투 중에라도 적십자 구호차량이 지나가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국제관례처럼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국제적십자를 창시한 '앙리 뒤낭'의 공헌이 큽니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벨상을 수상할 때 그는 평범한 노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생활고에 찌들어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릅니다. 인류에게 사랑의 구호단체를 선물했지만, 앙리 뒤낭의 개인사업은 실패하여 어렵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국제적십자사의 창시자는 스위스인 앙이 뒤낭이다. 지금도 그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앙리 뒤낭](사진: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국제적십자사의 창시자는 스위스인 앙이 뒤낭이다. 지금도 그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앙리 뒤낭] / ⓒ Todd Frantom)


앙리 뒤낭이 국제적십자를 창립하게 된 것에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원래 앙리 뒤낭은 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어려워지자 도움을 받기 위해 나폴레옹3세를 찾아서 '솔페리노'로 갔습니다. 나폴레옹3세는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의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움은 받지 못하고, 돌아가던 길에 전투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고는 구호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9천명이 넘는 부상자가 방치되어 죽어가는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구호를 호소했고 수많은 젊은이를 살렸습니다. 


사진: 솔페리노의 회상을 쓰게 된 솔페리노 전투의 그림. 부상당하고 버려져서 죽어가는 병사를 구호했다.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앙리 뒤낭(사진: 솔페리노의 회상을 쓰게 된 솔페리노 전투의 그림. 부상당하고 버려져서 죽어가는 병사를 구호했다.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앙리 뒤낭 / ⓒ 미상)


전쟁터에서의 앙리 뒤낭의 구호활동은 일찍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상대편 병사는 버려진 채 죽어가야 했지만, 앙리 뒤낭은 적군이든 아군이든 정성껏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경험을 써서 '솔페리노의 회상'을 출판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동참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단체가 지금의 국제적십자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개인사업에서 실패하고, 구설수로 인해 적십자 회장직에서도 밀려났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다 잃은 상태에서 겨우 연금에 의지해서 사는 노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앙리 뒤낭은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 봉사와 사랑을 실천한 인물로 역사에 남겨 되었습니다. 


사진: 앙리 뒤낭을 기념하기 위한 우표. 앙리 뒤낭의 생년월일과 적십자의 창립년도가 표시되어 있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사진: 앙리 뒤낭을 기념하기 위한 우표. 앙리 뒤낭의 생년월일과 적십자의 창립년도가 표시되어 있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 / ⓒ 미상)




적십자의 창립자 앙리 뒤낭의 인생


앙리 뒤낭은 18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컸기 때문에 어려움을 몰랐던 그는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고아 시설의 국장을 했고 어머니도 고아원을 위해 봉사활동을 벌였습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앙리 뒤낭도 봉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청소년 시기에 친구들과 모여서 빈민촌 봉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단체가 세계적인 YMCA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YMCA는 조지 윌리엄스가 주도한 기독청년단체이다. 봉사모임으로도 유명하다. [적십자의 창립자 앙리 뒤낭의 인생](사진: YMCA는 조지 윌리엄스가 주도한 기독청년단체이다. 봉사모임으로도 유명하다. [적십자의 창립자 앙리 뒤낭의 인생] / ⓒ Andrew Watson)


청년시절의 앙리 뒤낭은 은행직원으로 아프리카의 알제리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땅을 사고 이익을 취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돈을 벌겠다고 결심하고 사업가로 변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돈을 더 빌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스트리아와 전투 중인 나폴레옹3세를 만나러 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병사들은 총알이 모자라서 백병전을 치렀는데, 앙리 뒤낭은 여기서 부상병들이 들판에 버려진 채 죽어가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사진: 야전병원에서 얻는 경험으로 솔페리노의 회상을 쓴 앙리 뒤낭. 그의 젊은 시절과 노년의 모습이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사진: 야전병원에서 얻는 경험으로 솔페리노의 회상을 쓴 앙리 뒤낭. 그의 젊은 시절과 노년의 모습이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 / ⓒ www.kiss7.kr 편집)


앙리 뒤낭은 셔츠를 찢어 붕대를 만들고 부상병들을 도우며 중립적인 구호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은 팽개치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구호단체의 필요성을 호소했으며, 결국 적십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운영방법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사업에 실패하여 빚더미에 오르며 구설수에 휘말렸습니다. 적십자와 YMCA지도부에서 물러난 이후 10여 년 동안 떠돌이 신세로 어렵게 지내다가, 나중에야 친척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우울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앙리 뒤낭 본인은 그날들이 괴롭지만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도 가진 것이 가고 싶다며 장례의식을 생략한 채로 묻혔습니다. 


사진: 적십자의 창립 5인. 이상추구를 원했던 앙리 뒤낭은 현실적인 운영을 원했던 다른 멤버들과 사이가 벌어졌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사진: 적십자의 창립 5인. 이상추구를 원했던 앙리 뒤낭은 현실적인 운영을 원했던 다른 멤버들과 사이가 벌어졌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 / ⓒ icrc.org)



최초의 노벨평화상과 앙리 뒤낭의 적십자


앙리 뒤낭이 창시한 적십자는 중립의 입장에서 인간적인 봉사활동을 한 최초의 국제단체입니다. 처음엔 부상자의 구호가 활동목표였지만, 포로의 인권, 가정과 청소년의 보호, 혈액공급 사업, 자선 및 빈민구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적십자는 각국의 적십자사와 세계적 연맹이 따로 존재하며, 이 둘을 통합하는 국제적십자사가 있습니다. 너무 거대화된 나머지 비리가 생기면서 신뢰를 많이 잃은 것도 사실이지만, 앙리 뒤낭의 인도적인 이상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진: 이제 적십자는 부상병 구호 뿐 아니라 복지와 봉사와 인권에 대한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 [최초의 노벨평화상과 앙리 뒤낭의 적십자](사진: 이제 적십자는 부상병 구호 뿐 아니라 복지와 봉사와 인권에 대한 수많은 일을 하고 있다. [최초의 노벨평화상과 앙리 뒤낭의 적십자] / ⓒ Иво)


앙리 뒤낭은 1901년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노벨'의 유언으로 노벨상 상금이 정해졌으나, 당시 돈으로도 17억이나 되는 큰 금액이다 보니 법적 소송이 일어나서 5년 후에나 최초의 수상자가 결정된 것입니다. 원래 노벨상은 스웨덴에서 주는 것이지만, 노벨평화상만은 노르웨이 위원회가 선정하고 있습니다. 앙리 뒤낭의 적십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되는 중립적 구호단체라는 공헌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적군도 아군도 부상자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이상세계'가 현실화된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노벨평화상 수상과 더불어 조국 스위스의 평화이미지도 높여준 앙리 뒤낭. 그러나 죽음은 조촐하게 맞았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사진: 노벨평화상 수상과 더불어 조국 스위스의 평화이미지도 높여준 앙리 뒤낭. 그러나 죽음은 조촐하게 맞았다. [앙리 뒤낭 -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국제적십자 창시자] / ⓒ Adrian-Uy)


앙리 뒤낭의 존재는 스위스는 중립국이며 평화의 국가라는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기 사업에 실패하면서도 인간성과 사랑을 전파한 그의 노력은 나라의 명성도 함께 높여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뒷면에는 봉사에 헌신한 앙리 뒤낭의 부모가 있었기에,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함께 교훈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자가 사랑을 베풀고, 봉사를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봉사를 한다는 단순한 진리는, 앙리 뒤낭이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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