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위기 - 케네디와 핵미사일 사태, 핵전쟁 발발 사건]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확률이 가장 높았던 때를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로 꼽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과 구.소련이 쿠바를 사이에 두고 핵미사일을 설치하느냐 막느냐의 대결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때 세계는 전쟁 준비에 들어갔었고 당시 책임자 중 한 사람은 "다음 주에 인류가 살아있을까?"하고 고뇌했었다고 합니다. 그때 나왔던 유명한 캐럴이 "Do You Hear What I Hear?"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전의 세계정세
쿠바 미사일위기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쿠바와의 관계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쿠바'는 미국 남부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나라입니다. 1959년, '카스트로'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미국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당시는 미소냉전체제였으므로 카스트로는 당연히 구.소련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대문 앞에 적을 둔 것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사진: 동맹을 맺은 쿠바와 소련의 정상들.카스트로와 흐루시초프가 기념 악수를 하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전의 세계정세, 케네디, 흐루시초프, 카스트로] / ⓒ wikimedia.org)
당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새로 뽑혔습니다. 너무 젊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유약한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있었으므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마침 CIA에서 쿠바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이때까지는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500명이나 투입한 쿠바침공작전인 '피그만 침공'이 완전히 실패하며 케네디는 오히려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반대로 카스트로는 열 받아서 소련의 '후르시초프'에게 핵무기를 원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진: 젊은 케네디 대통령. CIA등의 강경파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나중에 암살당하고 만다. [쿠바 미사일 위기 전의 세계정세, 케네디, 흐루시초프, 카스트로] / ⓒ cbsnews.com)
소련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요청이었습니다. 미국은 유럽과 터키에 핵무기를 배치하여 소련의 수도까지 사정권 안에 넣고 있었지만, 소련은 미국과 가까운 곳에 핵무기를 배치한 곳이 없었습니다. 소련 입장에서는 불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쿠바가 앞장서서 도와준 것입니다. 더구나 미소냉전체제라고 하면 양측이 동등한 입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술핵무기 보유량에서 소련은 완전히 열세였습니다. 미국이 17배나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소련이 어떻게든 균형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의 시작입니다.
(사진: 쿠바 위기 당시의 미사일 배치도. 소련이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1980년대가 되서야 비슷해지게 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전의 세계정세, 케네디, 흐루시초프, 카스트로] / ⓒ Google Maps / www.kiss7.kr 편집)
실제 핵전쟁 사태 -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소련은 미사일 시설 건설 인력과 핵탄두와 R-12형 미사일을 전달했고 쿠바는 설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건설과정이 미국의 고공 정찰기인 U-2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이 미사일은 워싱턴까지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국방부, CIA 등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CIA는 쿠바를 침공하거나 폭격하자는 강경파였고 케네디와 국방부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온건파였습니다. 강경파는 소련까지 연결된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에서 선제공격과 전면공격을 주장했으므로 제3차 세계대전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진: 쿠바에 배치된 R-12형 핵탄두 미사일의 모형. 사정거리는 워싱턴과 미국 동부전역이었다. [실제 핵전쟁 사태 - 쿠바 미사일 위기] / ⓒ wikimedia.org)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는 더욱 급박한 상황으로 계속 치달았습니다. 소련이 미국 전체를 사정거리로 하는 R-14형 미사일도 쿠바로 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과의 전면전을 벌일 경우 자칫하면 인류 멸망의 날이 올 수도 있으므로, 케네디는 쿠바섬을 봉쇄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소련도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핵잠수함 6척으로 호위하며 수송선을 쿠바로 보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항공모함 등 90척의 함대로 완전 봉쇄를 했습니다. 소련이 자존심을 지키려고 강행을 한다면 미국의 공격을 받고 제3차 세계대전, 핵전쟁으로 가는 순서였습니다.
(사진: 소련에서 R-14형 핵탄두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했던 폴타바호. 핵잠수함들이 호위를 했었다. [실제 핵전쟁 사태 - 쿠바 미사일 위기] / ⓒ wikimedia.org)
쿠바는 전쟁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미국과 소련의 전투기들은 전술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출격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플로리다로 핵미사일이 날아온다고 오인하여 보복 핵공격을 할 뻔도 했고, 미군의 훈련을 공격으로 착각한 소련 잠수함이 핵공격을 시작할 뻔도 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최고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받지도 못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가 종료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단 한 번의 오해만으로도 바로 핵전쟁으로 치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진: 쿠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미국 정상의 EXCOMM 회의 모습. 인류 멸망을 각오하고 전면전을 벌이자는 강경파도 있었다. [실제 핵전쟁 사태 - 쿠바 미사일 위기] / ⓒ wikimedia.org)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의 결과
미국은 영토 바로 앞 쿠바에 핵무기가 설치되는 것을 막아야 했고 소련은 동맹국 쿠바를 지원하기 위해 핵무기를 설치해야 했던 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입니다. 하지만 각국의 강경파가 주장하듯 끝까지 대치를 하게 되면 100% 핵전쟁으로 번지고 죄 없는 일반인들만 죽어갈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총칼을 겨냥하던 유럽으로도 전쟁이 번질 것이고, 그 틈에 한국에서도 다시 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마침내 소련 흐루시초프가 작전을 철회했습니다. 그러면서 터키에서의 미국 핵미사일 철수와 쿠바의 안전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사진: 오른쪽, 소련의 미사일과 U-2기에 찍힌 쿠바 배치 핵미사일 기지의 정찰사진.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의 결과. 핵전쟁의 위험] / ⓒ gabrielmbulla / www.kiss7.kr 편집)
소련의 핵무기 배치 철회에 쿠바의 카스트로는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동맹국 쿠바 하나를 돕자고 인류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해군력이 미국에 비해 너무 약하여 미군 함대를 뚫고 갈 수도 없었고, 핵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미국의 17배나 많은 핵미사일을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 후 미국은 소련의 철회에 응답하여 터키의 핵무기를 철수했고 쿠바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소련도 이미 쿠바에 배치된 핵미사일을 철수시켜 줬습니다. 그해 겨울 미국에서는 'Do You Hear What I Hear?'라는 평화의 캐럴이 작곡되기도 했습니다.
(사진: 인류 멸망의 위기를 넘기고 평화를 기원하는 캐럴인 'Do You Hear What I Hear?'이 빅히트를 하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의 결과. 핵전쟁의 위험] / ⓒ Gerd Altmann / www.kiss7.kr 편집)
다행히 핵전쟁의 위기를 넘긴 후 케네디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흐루시초프는 2년 후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는 것으로 많은 원망을 산 것입니다. 소련에게도 터키와 이탈리아에서의 미국 핵무기 철수, 쿠바 침공 방지의 성과가 있었지만 내부 여론은 굴욕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최고지도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투폭격기가 핵탄두를 탑재하고 작전을 수행하거나 보복 핵공격이 시도되었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소 상호간 전화선도 개통이 되었습니다. 이후 소련은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 핵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해군력 강화에 나섰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는 새로운 위기를 남겨 놓은 채 마무리되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