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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삼전도 굴욕 보다 더 했던 백성들의 정묘호란 병자호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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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삼전도 굴욕 보다 더 했던 백성들의 정묘호란 병자호란

키스세븐지식 2017. 10. 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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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삼전도 굴욕 보다 더 했던 백성들의 정묘호란 병자호란]






나라의 패망은 지도층으로 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사대국인 명나라와 신생 강자인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하던 광해군을 내 쫓고 왕에 오른 인조와 집권당인 서인은 명나라에 대한 극사대 외교를 벌입니다.



이에 후금에서 이름을 바꾼 청나라는 조선 침략의 꼬투리를 잡고 침략을 하는데, 잘 알려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정권욕에 눈이 먼 집권층의 잘 못된 판단과 구태의연한 보수적 집단의 문제가 한 나라의 모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심지어 이괄의 난 등으로 혼줄이 난 인조와 서인들은 북방에서 군사훈련을 하면 감시를 해서 오히려 국방력을 약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더구나 인조 등극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백성을 괴롭히고 죽였어도 명나라의 모문룡을 평안도에 진군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싸울 방비도 없이 싸움을 부추긴 결과는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익히 알려진 삼전도의 굴욕을 당합니다. 

인조는 40여일을 남한상성에서 버텼으나 결국은 항복하고,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하며 청나라 왕에 대해 군신관계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역사의 좁은 시각은 오로지 이것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국가의 안보는 생각 못한 채 사대에 얽매이다가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서 정권유지에만 급급하는 동안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지역의 백성들은 약탈과 유린에 고통스러워 해야 했습니다. 또한 엄청난 수의 우리 국민이 끌려가서 낯선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지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삼전도의 굴욕)







억울하게 끌려간 백성이 30만 명 이상 


청나라는 볼모를 만들기 위해 인조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딸들도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우리 백성들이 끌려갔는데 그 수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당시 청나라 측의 기록에는 8만 명 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 측 기록에는 적게는 30만 명, 많게는 50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0만 명설은 조금 과다한 측면이 있으나 30만 명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현재 제2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세종시의 인구가 15만 명 정도 됩니다. 여기에는 유아와 노약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끌려간 인구는 노동가능 인구입니다. 지금으로 봐도 중소도시 서너 개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중기의 인구는 500~6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전 조선인구의 5%~10%가 끌려간 셈입니다. 유아, 노약자를 제외한 십대 이상만 해서 이 정도라면 인구의 공백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느껴질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웃집 몇 군데 중 한집은 반드시 끌려간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못나고 자기이익만 챙기는 정치집단을 둔 덕에 고향산천을 떠나 막막한 타향에서 한탄하며 죽어갔을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누가 끌려가고 그 후로 어떻게 죽어갔는지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청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압록강에 투신해서 죽는 사람의 수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영화 최종병기 활 중에서)






되돌아 올 수도 없고, 되돌아 와도 눈물 뿐인 백성 


경우에 따라서는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아 왔다고도 하지만 권력층의 얘기일 뿐 힘없는 백성은 대부분 제외되었을 것이 뻔합니다. 세금과 노역과 병역까지 제공하면서도 지배당하고 살아온 그들은 버림 받듯이 타향에서 사라졌습니다.

몸값은 300양 정도의 금액이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높은 금액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고위층, 부자들이 작기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마구 몸값을 높여 지불하다보니 전체 몸값도 올라가서 서민층에서는 엄두도 못내는 금액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끌려가면서 죽어간 사람, 불구가 된 사람, 강간당하고 폭행당한 사람, 그리고 노예처럼 팔려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다시 떠나가야 했던 사람... 청나라의 수도에는 조선인을 팔고 사는 인간시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역사는 남한산성의 임금의 굴욕에만 분노할 뿐 철저하게 망가진 그들을 기억하는 역사는 않습니다.


예전에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근대에는 몸을 파는 화류계 여성을 낮추어 부를 때 이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은 그때 끌려갔다 살아온 우리 부녀자를 부르는 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향으로 귀환한 여자라는 뜻으로 처음엔 환향녀라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나라사람들에게 강간당하거나 첩으로 살다 온 경우가 많다보니 정절을 우선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이들을 오히려 격멸하고 천시하였습니다.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치룬 것도 억울한데 돌아오니 가족과 고향 사람들이 냉대하는 처지에 쳐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말년도 원통하게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자는 병자호란 이전에도 몸을 파는 여자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주장하지만, 화냥년이라는 말의 어원에 관계없이 그들은 화냥년이라는 오명 속에 살아야했습니다. 이혼이 엄격히 금지된 조선사회지만 그녀들이 소박맞고 이혼 당하는 것만은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었다고 합니다.









전란이 끝나도 지배층은 달라지지 않는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정은 정신을 차리고 민생을 위했을까요?

그러나 생각보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분쟁이 더욱 가속되어 분파가 되었고 이후 영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탕평책이 왕들의 첫 번째 정책이 될 정도로 부담을 주는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제기된 북벌론은 현대의 종북론처럼 북벌을 핑계 삼아 반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호란 이후 민심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북벌론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더구나 자주국방의 정신으로 북벌론이 대두된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못 잊고 충성을 계속하려는 사대주의에 의한 북벌론이었기에, 병자호란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피해를 입은 민초들은 병자호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억압과 지배 속에서 다시 살아갈 뿐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일제 후에도, 6.25 후에도 지배층의 그런 모습은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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