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KAL기 납북사건 간첩 조창희와 생존자, 생환자
1969년, 간첩에 의해서 KAL기 납북사건이 있었습니다. 간첩 조창희의 짓이었습니다.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으로 인해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이 66일간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 16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북한은 심한 강압을 가했고, 승객들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당시 북한에 11명이 억류되었고, 지금도 그 상처는 가족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당시 상황으로 함께 되돌아가 봅시다.
KAL기 납북사건 간첩 조창희와 생존자, 생환자 -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고정간첩 조창희의 납치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북한으로 공중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승객으로 위장한 고정간첩 조창희가 조종실에 침입하여 기수를 북쪽으로 돌린 것입니다. 그 후 북한은 66일 만에 50명 중 39명만 돌려보냈지만 나머지 11명은 오지 못했습니다. 2001년 일부 가족이 이산가족상봉을 하면서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범인은 당시 42살의 조창희였습니다. 그는 속초에서 태어났으며 육군에서 17년을 복무한 준위 계급 전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전역 후 직업을 갖지 못하고 돈놀이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 북한에 포섭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북한의 지령을 받던 고정 간첩이었으며,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의 범인이 되게 됩니다.
비행기는 북한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당했습니다. YS-11기가 착륙하자, 조창희는 북한에서 미리 준비한 검은 세단 차량을 타고 사라졌습니다. 조종실에 권총을 가지고 들어갔고, 미리 마중 나와 있었던 점까지 본다면 고정 간첩으로서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근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과정
군 장교 출신이었지만, 전역 후 제대로 된 직업 없이 지내던 범인 조창희는 북한에서 돈을 받으며 고정 간첩으로 활동했습니다. 1969년 말, 비행기 납치를 계획해서 북으로 넘어갈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비행기가 납치하기에 좋을지 확인하기 위해 12월 6일부터 여러 차례 항공권을 예매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며 관찰했습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납치가 빈번하게 발생하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범인은 강릉 공항에서 이륙할 비행기 중에서 납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강릉 공항은 활주로가 얼어붙어 비행기가 결항되곤 했는데, 그 중 결항되었던 한 비행기가 이륙을 결정하자 이를 노리기로 했습니다.
조창희는 승객으로 위장해서 YS-11기에 탔습니다. 그런데 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단 제복을 입고 있었기에 보안 검색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당시 금속탐지기는 지뢰 탐지기를 급하게 개조한 것이었기에 권총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969년 KAL기 납북사건 전말
대한항공 YS-11기는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출발하여 김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낮 12시 23분경, 객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조창희가 권총을 들고 조종실로 들어갔습니다. 당시에는 항공기는 조종실과 객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에 쉽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종실로 들어간 범인은 조종사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했습니다. 할 수 없이 비행기는 대관령 상공 쯤에서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습니다. 북한 원산과 함흥 사이에 위치한 선덕 비행장으로 향한 것입니다. 조금 있자 북한 공군기 두 대가 나타나 유도했습니다. 그때서야 납치를 알게 된 KAL기 납북사건의 승객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공항에 착륙한 후, 조창희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 차량을 타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조종사는 억류당한 후 승객들의 신원이 노출돼서 불이익을 당할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방송으로 가지고 있는 신분증이나 사진을 모두 찢어서 없애라고 당부했습니다. 곧이어, 승객들은 버스에 태워져 손과 눈을 가린 채 끌려가게 됩니다.
심한 고초와 고문까지 받은 승객들
북한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려고 꼼수를 부렸습니다.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주장하고 "조종사 환영 시민대회"라는 것을 열어서 선전 조작극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종사와 부조종사의 얼굴을 본 승객은 그들 역시 극도의 공포 증상을 보였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조창희 단독 범행에 의한 강제 납북임을 의미합니다.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려간 승객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 후 승객들은 평양의 한 여관에 강제로 수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압적인 사상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죄수처럼 사상 교육을 강요받았습니다. 매일 북한 선전물을 시청해야 했으며, 감시관들은 호통을 쳐가며 제대로 집중해서 보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국제법을 어기고 있음을 항의하던 승객은 오히려 고초를 겪었습니다. 납북 승객 중에는 언론인도 있었는데, 나중에 나쁘게 보도할 것이 두려웠는지 오히려 더욱 강하게 세뇌 교육을 강요했습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승객은 끌고가서 약물을 투여하고 전기 고문을 가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66일 만의 송환자들의 실화
어떤 승객은 북한 체제에 반박했다는 이유로 2주 동안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하는 동안, 남한과 유엔은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그때서야 북한은 유엔에게 승객들이 모두 건강하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승객 전원을 돌려보낼 것처럼 했습니다. 북한에서 고생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라며 승객들의 머리를 미용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갑자기 39명만 송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습니다. 이미 그동안 자진 월북이라고 해왔기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나면 안 되기 때문에 11명을 남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남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1970년 2월 14일 51명 중 39명만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습니다.
승객들은 66일 동안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납북 당시의 기억과 후유증으로 인해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 한 승객은 고문을 당해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가족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결국 1년이나 심리 치료를 지원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째 납북자를 기다리는 가족들
되돌려 보내지 않은 대한항공 YS-11 여객기 승객들의 가족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비행기의 기장, 부기장, 승무원 등 4명 모두가 오지 못했고, 사업가 3명, 언론인 2명, 사회인 2명이 오지 못했습니다. 나이는 최소 23살, 최고 49살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정부는 미송환자들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북한의 무성의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대중 정부였던 2001년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여기에 성경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납치기에 탑승했던 여승무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직 북한에 7명이 생존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수십 년을 노력하던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가족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 사건 때문에 이후 한국의 항공 보안 시스템은 크게 변했습니다. 조종석과 객실이 분리되었고 항공기 안에 보안 요원이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신분 확인 절차가 강화되고 고성능 금속 탐지기가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제로 헤어진 가족들의 아픔은 아물지 못 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한숨만 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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