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휴전협상
실향사민, 포로 교환과 중국의 흉계
6.25 한국전쟁은 사실상 1951년에 거의 끝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휴전 협상을 하면서 실제 휴전은 195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병사들이 더 죽어가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년 넘게 휴전 협상이 길어진 결정적인 두 가지 원인과 이유를 꼽자면 중국의 흉계와 포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엔 반공포로와 중국 귀환 거부 포로 등의 문제도 있었고, 실향사민이라는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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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길어진 이유와 원인 - 실향사민, 포로 교환과 중국의 흉계
6.25 한국전쟁 휴전협상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었습니다. UN군과 중공군은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1년 만에 휴전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불과 6개월 만에 군사분계선까지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1951년 12월에 끝나지 않고 1953년 7월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포로 문제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중공은 6.25 한국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관심을 한국 쪽으로 돌릴 수 있었고, 소련과의 공산권 주도권을 강화하고 미국 주도의 전쟁 종료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기에는 중국군 포로 문제도 있었습니다.
휴전 협상은 점점 체제 간의 대결로 바뀌어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포로들을 조사 결과, 약 8만 명의 포로 중 5만 명이 송환을 거부했습니다. 특히 중국군 포로 중 70%가 송환을 거부하였고, 이는 약 6400명에 달했습니다. 북한군 중에도 반공포로들이 남한에 남을 것을 원했었습니다.
휴전협상이 길어진 이유와 원인
중공의 마오쩌뚱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남북간의 피난민에 대한 주장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국 측은 많은 수의 납북자들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자발적인 월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북한은 1.4 후퇴 때 북한에서 대규모로 피난을 간 것을 가지고, 남한이 피난민을 납치했다고 주장해 댔습니다.
하지만 서로 납치했다고 주장하고 또 서로 납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니, 휴전 협상이 진행될 리가 없었습니다. 납치 문제를 자꾸 제기하면 서로 충돌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양측 협상단은 "납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실향사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失鄕捨民(실향사민)의 뜻은 "남 때문에 고향을 잃고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실향민과 같은 의미지만, 버려질 사(捨)자를 써서 여러 가지 사연에 의해 지금의 현실을 맞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협상은 더 이상 나가지 못했습니다. 누구를 보낼지 말지는 너무나 복잡한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그리고 중국 사람도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북진, 남진이 순식간이었다 보니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봤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이 지금까지 이산가족으로 남아야 하는 결과가 됩니다.
실향사민과 포로 교환 소모전
이런 지지부진한 협상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전쟁을 통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보내주기로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UN군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 합의는 외국 국적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고, 북한에 남게 된 미국 국민들을 받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실향사민에 대한 협정문이 명시되자,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신문 구석에 광고를 냈습니다. 물론 남한이든 북한이든 일반인들은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니 돌아가고 돌아온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외국 국적의 사람들만 30여 명이 돌아왔을 뿐입니다.
실향사민 신청을 알았더라도 문제였습니다. 당연히 공산주의 북한은 강압이 있었고, 남한에서도 우파 보수 단체들이 이들에게 협박하고 인간적으로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동안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전투가 이어졌고, 전쟁은 협상을 핑계로 계속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전쟁을 더 하고 싶었던 중국과 포로 문제를 포기할 수 없었던 UN과의 줄다리기는 전쟁이 끝날 수 없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소모전이 계속되었고 수많은 피해가 더해졌습니다. 추정치로는 1952년 ~ 1953년 휴전 협상 기간 동안 죽은 병사의 수가 약 8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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