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 원인
군사반란, 군사정변 사태의 배경
4.19혁명으로 민주주의가 처음 제대로 열린 후, 딱 1년 만에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5.16 군사반란, 또는 군사정변이라고 부르는데, 이 5.16 쿠데타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5.16 군사반란의 원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가볍게 지나가 버렸던 다른 배경과 원인도 파악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으로 정리했습니다.
5.16 쿠데타 원인 - 박정희, 윤보선, 장면과 군사반란, 군사정변 사태의 배경
4.19 혁명과 군부 중립
1960년 4월 19일, 국민들은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트렸습니다. 1955년 대한민국 인구는 2150만 명 수준이었는데, 수십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정도 시위라면 전국민적인 저항이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좀 다른 것은, 이때의 군부는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후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세력이 된 군부와 비교해야 할 부분입니다.
4.19 혁명을 통해서 이승만은 하야했고, 제2공화국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제2공화국은 내각제로 바뀌었습니다. 대통령은 윤보선이, 총리는 장면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내각제였기에 실권은 장면에게 있었습니다.
시위와 5.16 쿠데타 원인
마침내 군부의 중립 속에서 4.19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은 조선이 끝나자마자 일제의 억압 속에 엎드려 살아야 했고, 광복을 찾은 후에도 이승만 정권에 엎드려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4.19 혁명은 최초로 국민이 자신의 뜻으로 정부를 교체한 사건이고, 최초로 민주주의를 맛본 사건이기도 합니다.
시위를 통해서 부패 정부를 몰아낸 국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부조리에 대해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문제는 진짜 민주주의를 처음 맛본 국민들의 시위 문화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새로이 들어선 장면 정부 초기 10개월 동안 무려 2000여 건의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너무나 시위가 넘쳐나자, 심지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있었습니다. 박정희와 군부 세력은 5.16 쿠데타의 원인을 이런 사회 혼란이라고 지목하고 있고, 현재 여러 매체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5.16 군사반란 원인
보수적인 자유당 정권이 물러간 후 정권을 잡은 것은 민주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민주당은 지금과 달리 매우 보수적이었기에, 보수 정권에서 보수 정권으로 넘어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면 정권은 이승만 시대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은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윤보선과 장면의 파벌 갈등이 심했습니다. 구파 정치인과 새로 들어온 신파 정치인이 있었고, 윤보선은 구파가, 장면은 신파가 밀어주었습니다. 구파는 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독차지하고 싶었고, 신파는 대통령을 내어주는 대신 실권자인 총리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과 총리를 맡게 되었으므로, 윤보선과 장면은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윤보선은 장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5.16 군사정변의 성공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오히려 쿠데타 진압을 반대해서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우월주의 엘리트 의식의 문제
박정희와 군부 장교들은 4.19 의거 초기에 중립을 지켜준 군부가 아니었습니다. 6.25전쟁으로 군인 수는 늘어났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승진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육사를 졸업한 젊은 장교들은 더욱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장교들 중에 박정희와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의 육사 8기생 장교들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25%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까지 고급 교육을 받은 이들은 엘리트 의식에 찌든 자들이었습니다. 남들은 무식하고 부패했으니 자신들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5.16 군사반란 세력의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무성한 반란 소문이 있었음에도 한국 정부는 증거를 잡지 못했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참모총장 장도영이 장면을 따돌리면서 오히려 쿠데타를 도와주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과 북한은 반란을 제대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기회주의자 박정희
미국은 이미 1960년 2월부터 박정희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4.19 의거가 있기 두 달 전부터입니다. 미국 정보부는 1961년 4월 군부 반란 가능성에 긴장했습니다. 북한 역시 3월 31일에 반란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1939년 만주신문을 보면, 박정희는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한다는 혈서를 일제에게 바쳤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1948년 남로당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동료들을 밀고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고 마침내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봤을 때, 5.16 쿠데타의 원인이 오직 불안정한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그 말대로 한다면, 사회가 혼란을 겪을 때마다 군인이 정치를 불법으로 빼앗아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이처럼 박정희 자체가 권력욕이 매우 강한 기회주의자였다는 점도 고려돼야 합니다.
5.16 배경 다시 보기
군사반란 군사정부는 말하길, 시위로 혼란한 사회와 무능한 정부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아직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것뿐일까, 아니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일으킬 반란이었나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시위를 통해 지배자를 바꾼 것을 경험한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간은 이런 흐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혼란의 시위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미숙햇던 것은 사실이고, 몇 년씩 했던 것도 아닙니다.
장기간 억압된 자유가 겨우 풀려난 시점이고, 그래서 다양한 정치적 요구가 표출되는 시기였다는 것은 당연한 흐름입니다. 시위 중에는 국민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도 있었고, 1년 동안 언론사가 10배로 불어난 긍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사회 혼란 때마다 군대가 해결해야 한다면 전 세계가 군국주의가 될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윤보선, 장면의 파벌정치
5.16 쿠데타의 원인을 제공한 윤보선과 장면 등 정치인들은 파벌정치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치 때보다 못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군대가 국가를 점령해야 할 정도였는지까지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시 장면 내각은 "경제제일주의"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일했고, 박정희 정부에서 치적으로 자랑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구상을 했던 정부였습니다. 제조업 부가가치 및 생산지수, 전력생산과 산업용사용량 증가율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그러나 진짜 문제는 5.16 군사정변이 있은 후 미국이 제압하려고 할 때 이것을 막은 사람이 윤보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구파와 신파가 파벌정치를 했기에 상대를 몰락시키기 위해서 민주주의적 후퇴를 눈감아 주었다는 것이 더욱 큰 역사적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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