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냅코 작전 요원A
자신만 잘 먹고 잘살려는 재벌과 다른 기업인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인 냅코 작전에서 요원A였던 유일한입니다. 그는 유한양행의 사장이었습니다.
안정적인 회사를 가진 그는 어쩌다가 한반도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된 것일까요? 미국 OSS가 1945년 벌이려던 침투작전이 기밀해제되면서 알려진 그의 숨겨진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후로도 본받을만한 기업인이 되기까지의 일생도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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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코 작전 요원A 유일한 - 유한양행 창업주의 독립운동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기업인 '유일한'은 "유한양행"의 설립자입니다. 유한양행은 제약, 화학 회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한락스, 안티푸라민, 삐콤씨, 쎄레스톤지 등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관련 회사로는 한국얀센, 유한킴벌리 등이 있습니다.
그는 1895년 태어나서 1971년에 죽었습니다. 죽을 때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환원하는 선행을 보였습니다. 손녀딸 학비 1만 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한공업고, 유한대학교가 유언에 따라 설립된 학교입니다.
그는 정직한 기업인이라는 좋은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17년, 미국 CIA가 약 200만 건의 기밀문서를 해제하면서 놀라운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1944년 미국은 "냅코 작전"을 준비했었는데, 유일한이 요원 A라는 이름으로 냅코 유격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냅코 작전이란
일본이 아직도 한국에 대해 반성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국이 승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남북으로 갈리게 된 이유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1945년에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 아쉬운 역사 중 하나가 OSS의 작전이었습니다. 냅코 작전이란 미국 특수공작기관이 준비했던 침공작전 중 하나입니다. 1944년부터 준비된 이 작전은 한국인들을 모집해서 혹독한 무장 유격훈련을 시켰습니다. 20대 50대까지의 남성이었고, 이중 13명은 기혼자였으며 50대는 2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3~4개월간 침투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2만 달러를 들여 침투용 잠수정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작전이 실행되기도 전에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이 작전은 그냥 묻혀버립니다.
요원A 유일한
철저한 기밀이었기에 이름도 없이 A, B, C...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이 김강, 변준호, 이근성, 유일한, 최진 등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2017년 미국 CIA가 비밀해제된 문건 1300만 페이지를 공개하면서 알려진 것입니다. 여기서 요원 A가 유일한이었다는 것도 밝혀집니다.
50대 남성의 기혼자 요원이 바로 그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조선 땅에서 버젓이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에서 태어난 유일한은 미국 유학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기업을 세운 후 다시 미국에 갔다가 냅코 작전에 참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학은 그의 아버지 '유기연'이 조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보낸 것이었습니다. 겨우 9살에 미국에 간 그는 모진 고생을 하며 미시간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1926년 한국에 돌아와서는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사업에 성공했지만 다시 미국에 간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두 번째 유학은 사업을 하던 중에 잠시 동생에게 운영을 맡기고 미국에 간 것이었는데, 이때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터졌습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미국에서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유일한은 유한양행의 사업 조직망 전체를 독립운동의 지하조직으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특수공작기관 OSS의 냅코작전에 유일한이 요원 A로 참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 1946년에 고국에 돌아온 그는 지금의 유한양행으로 회사를 성장시켰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유일한은 다른 재벌처럼 부를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겨주고 친척들의 주식까지 모두 처분해서 간섭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라는 그의 명언은 돈에 눈이 번 재벌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아래는 유일한의 재산기부 유언입니다.
"첫째,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되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공업 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 달라. 셋째, 내 소유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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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코 작전 요원A 유일한 - 유한양행 창업주의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