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퇴와 흥남철수
장진호 전투 원인/이유
이 글은 흥남철수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 다룹니다. 그러니 당연히 1.4 후퇴의 원인도 언급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북진과 중공군 참전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전체적인 요약을 보려면 아래 링크를 이용하십시오.
흥남철수는 장진호 전투의 원인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또한 레너드 라루 선장의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알아봐야 하지만, 이는 따로 추가 문서가 작성될 예정입니다. 여기서는 맥아던 장군 - 중공군 참전 - 장진호 전투 - 흥남철수 배경으로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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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1.4 후퇴, 흥남철수 원인과 이유 - 중공군 참전과 장진호 전투
1.4 후퇴의 원인과 이유
9월 인천상륙 작전 이후 한국군과 UN군의 북진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뜻. 거침없이 쳐들어가는)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맥아더' 장군은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동쪽의 미8군과 서쪽의 미10군을 그냥 풀어 놓고 경쟁시킨 것입니다. 그 사이를 뚫리는 약점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한편, 중공군은 10월 초에 몰래 한국에 넘어와서 숨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이를 모르고 있다가 당한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이후 드러난 자료들에 의하면 미군과 맥아더도 중공군의 참전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8군과 10군을 유기적인 작전 없이 그냥 풀어놨었습니다.
1.4 후퇴의 원인은 결국, 중공군이 뒤를 돌아서 약체인 한국군을 먼저 타격한 뒤 미군의 후방을 끊어 놓은 것에 있습니다. 그나마 미8군은 포위당하지 않고 후퇴가 가능했지만, 미10군은 많은 산맥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중공군의 진격 속도보다 느렸던 것이 문제가 됩니다.
중공군 참전과 맥아더의 실수
최근 드러난 문서에 의하면, 미정보국은 1.4 후퇴 이전에 이미 중공군의 참전을 알고 있었고 이를 보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축소 보고합니다. 이런 맥아더의 실수 때문에 중공군의 11월 2차 대공세가 성공하게 됩니다.
맥아더는 매우 보수적이고 제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남의 말을 안 듣는 성격이었기에 약점 또한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중공군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제공권이 UN군에 있었으니 다 폭격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보수주의자의 문제는 변화 적응에 늦다는 것입니다.
중공군은 이미 수년간 중국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거친 부대였습니다. 하루에 30km 이상으로 돌파하는 보병의 속도는 산속에서 속도를 못 내는 미군 자동차보다 빨랐습니다. 그들은 미8군과 미10군 사이를 뚫고 고속 진격해서 미10군 뒤에서 나타났습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장진호 전투의 원인이며 배경이었던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의 원인과 결과
속도가 빠른 중공군은 어느새 미군보다 더 남쪽으로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해전술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이렇듯 중공군이 엄청난 속도로 신출귀몰했기에 항상 많게 느껴진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진호 전투 기간인 11월 27일 ~ 12월 11일은 최악의 전투 기간이 됩니다.
장진호 전투의 원인은 흥남철수 지점까지 가는 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탈출구였기에 UN군은 사력을 다해야 했고, 중공군은 이를 이용해서 포위 섬멸하려고 들었습니다. 마침내 1만2천 명의 미 해병 1사단은 12만 명의 중공군 7사단에게 포위당했습니다.
미군은 그중 7천5백 명이 죽어가며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포로가 되며 희생을 치렀기에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주었기에 흥남시 외곽에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이 방어 전선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흥남철수의 원인과 1.4 후퇴
"1.4 후퇴"란 뜻은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포기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군과 UN군은 10월 말부터 계속적인 철수 작전을 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 서부전선의 큰 작전이 바로 흥남철수작전입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군을 후방으로 빼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계획에 없던 민간인 피난민 후송작전으로 번졌습니다. 여기에서 미군 10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부산, 경남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배가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입니다. 이 배는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3명의 큰 공로자가 있습니다. 미군에게 구조를 요청한 '김백일' 제1군단장, 실질적인 설득을 노력한 통역 고문관 '현봉학', 그리고 선뜻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나선 '레너드 라루' 선장입니다. 덕분에 UN군과 민간인들을 북한군의 대학살을 피한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흥남철수 작전 성공의 의미와 결과
철수작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됭케르크 철수 작전"은 약 30만 명의 군인들을 탈출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어려운 피난민 10만 명 대탈출을 군인 10만 명과 함께 성공한 것이 흥남철수 작전입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12월 23일은 그렇게 매섭고 추웠습니다.
흥남철수 작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수많은 군인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 뒤에는 인류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중공군과 북한의 공군력, 해군력이 형편없어서 후퇴하는 UN군의 뱃길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인 사건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후 김백일은 1951년 군작전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고,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는 현봉학은 2007년 노환으로 죽었으며,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가톨릭의 수사로 은둔하다가 2001년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한국군과 UN군의 죽음도 있었으니,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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