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 2
4.19의거와 김주열 사망
3.15 부정선거 - 김주열 열사 사망 - 4·19 혁명의 순서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난 1편에서 김주열 학생의 사망과 시신 유기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2편에서는 김주열의 어머니와 부패 경찰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4.19 마산의거는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맞을 뻔한 첫 번째 사건입니다. 맨 아래에는 4.19 의거를 간략히 이해할 수 있도록 따로 만든 문서가 있으니, 역사 이해가 필요하면 참고하길 바랍니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1편, 2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글은 2편입니다. 아래 추천글 링크에서 1편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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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김주열 열사 사건 - 김주열 학생 어머니와 경찰 등 정리 2
김주열 시신 사진에 국민이 분노하다
이것은 분명히 살인이었습니다. 언제 경찰이 와서 증거를 덮기 위해 시신을 없애버릴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상황을 직감한 부산일보 '허종' 기자는 즉시 김주열의 시신 사진을 찍어 1면 기사로 내보냈습니다. 이것이 AP통신으로 세계로 보내졌고, 이젠 숨길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김주열을 부검한 뒤에도 결과가 발표되지 않고 미뤄지지 않았고, 이에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시신이 있는 도립 마산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시신을 내놓으라면 살인 선거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마산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마산은 완전히 전쟁터처럼 되었습니다. 경찰서를 공격하고 방화를 저지르며 김주열 사건은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날 밤 9시가 넘자, 경찰은 카빈 소총을 지급하며 발포를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중학생,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하며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주열 어머니의 기막힌 비극
'홍진기' 내무장관과 '신언한' 법무차관은 발표를 통해서 "마산의거"를 북한 빨갱이의 조종을 받은 소요라고 뒤집어씌웠습니다. 현재도 자기편을 안 들면 좌파라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는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나쁜 버릇의 뿌리 역시 이런 방법입니다.
그런데, 죽어서도 시신 유기 사건은 계속되었습니다. 경찰은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몰래 시신을 빼내서 고향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앰뷸런스에 실린 채 모친에게 보내진 시신... 더욱 잔인했던 것은, 그 상황에 "시체 인수증"에 서명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4월 15일, 이승만은 마산시위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당한 시위라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4.19 의거"는 김주열 열사 사건으로부터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김주열 열사와 4·19 혁명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마산과 전주로부터 점점 북쪽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마침내 서울까지 시민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으로부터 대학생까지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4월 18일, 정치깡패들이 이들을 습격해서 폭행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마침내, 4.19 의거는 당시 인구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1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경찰은 실탄을 발사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김주열로부터 4·19혁명까지의 거대한 민주화 물결이 성공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열망도 잠깐의 봄으로 끝납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가 국민의 희생을 가로채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혁명재판소가 열렸습니다. 각종 혁명 재판이 열렸는데, 여기에는 4.19 책임자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35년 만의 졸업장
그렇다면, 김주열 사건의 범인이나 다름없는 박종표는 어찌 되었을까요... 물론 그 죄가 너무나 커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루탄 발사를 끝까지 부인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인정해 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주었습니다.
그 후 박종표는 어찌 되었는지 기록이 남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4·19혁명의 열사인 김주열 학생의 시신은 고향인 금지면에 안장되고 시민들의 추모를 받았습니다. 또한 서울 4.19 민주묘지와 마산 3.15 민주묘지에도 그의 가묘가 모셔져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의 비극을 맞은 지 35년이 흐른 뒤, 그가 1학년으로 입학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는 그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50년만인 2011년에는 시민들이 정식 장례를 치러주며 어린 학생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1편, 2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글은 2편입니다. 아래 지식거리 링크에서 1편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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