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 부검과 시신 1

2022. 1. 24.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 부검과 시신 1


 

김주열 학생 1

3.15 부정선거와 최루탄 사망 사건

 

1960년, 독재를 꿈꾸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국민들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찾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시민 자력의 민주주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도화선이 된 것은 김주열 열사로부터였습니다.

 

3.15 부정선거 시위 중, 김주열 학생은 최루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리고 시신이 인양지가 된 마산항 1부두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시신을 유기한 것은 경찰입니다. 이 글은 여기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1편, 2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글은 1편입니다. 아래 추천글 링크에서 2편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 부검과 시신 1

 

4.19와 김주열 열사의 관계

 

[왼쪽 이승만, 오른쪽 이기붕]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 ⓒ KTV

마산 '김주열' 학생 사건은 "4.19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기에, 당시 상황 먼저 살펴봅니다. 1960년에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의 '조병옥'이 질병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선거를 며칠 앞두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 보수주의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3.15 부정선거"를 저지릅니다. 광주에서는 부정표를 발견한 시민을 정치깡패가 잔인하게 폭행하는 사건이 터지고, 마산에서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15살의 김주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마산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시위에 참여했는데, 그 후 행방불명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주열 학생의 시신

 

[어린 김주열 학생 얼굴 사진]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 부검과 시신

원래 고교 합격자 발표는 3월 14일이었지만,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려고 교육부가 3월 16일로 연기하는 바람에 학생은 마산에 더 머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합격을 확인했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김주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날 밤 10시쯤, 교통주임이 경찰서장에게 최루탄에 맞은 시신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은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일단 시신을 경찰서로 옮겨 가기로 했습니다.

 

3월 16일, 김주열의 시신 유기에 동원된 운전사는 갓 20살이 된 '김덕모'였습니다. 그는 지시에 따라 경찰 3명, 민간인 1명을 태우고 마산세무서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엔 알루미늄 최루탄이 한쪽 눈에 박힌 어린 시신이 있었습니다.

 

 


 

3.19 부정선거와 김주열 열사

 

[김주열 시신 사진이 실린 신문]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 ⓒ busan.com

그들은 처참한 변사체를 차에 옮긴 뒤, 마산항 1부두로 달렸습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지시에 따른 김덕모는 겁에 질려야 했습니다. 경찰은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 부두로 가자고 한 뒤, 시체에 돌을 묶어 바다에 던졌다고 합니다.

 

이 일을 주도한 것은 일제시대에 헌병보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악질 친일파 '박종표' 경비주임이었습니다. 그는 "반민특위" 때 반역자로 붙잡혔으나, 이승만 측 보수파가 주도한 반민특위 해체로 인해 풀려나서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나중에 박종표는 고등학생까지 부정선거 시위에 참여하자, 학생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인물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하는 데에 아무것도 모르고 동원된 김덕모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때의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김주열의 시신 인양지

 

[김주열 시신 인양지의 주소는 마산합포구 해안대로다]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 부검과 시신 / ⓒ cha.go.kr

학생이 실종되자 고향에서는 그의 어머니 '권찬주'가 마산까지 와서 애타게 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고향으로 떠났는데, 바로 그날 창원시 마산 앞바다에서 한 낚시꾼이 학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김주열의 시신 인양지는 지금 주소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 (신포동1가)번지였습니다. 무려 실종 27일만인 4월 11일에야 시신이 발견된 것입니다. 아직 바다가 차기 때문에 마치 냉동상태처럼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김주열 사건의 시신은 끔찍했습니다. 눈에서 뒷머리까지 지름 5cm, 길이 20cm 크기의 고성능 최루탄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군중을 향해 쏘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벽을 뚫고 들어가서 폭발할 수 있을 정도의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1편, 2편으로 되어 있으며, 이 글은 1편입니다. 아래 지식거리 링크에서 2편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볼 심심풀이 지식거리

 

4·19혁명의 김주열 열사 사건 - 김주열 학생 어머니와 경찰 등 정리 2

 

4·19혁명의 김주열 열사 사건 - 김주열 학생 어머니와 경찰 등 정리 2

김주열 열사 2 4.19의거와 김주열 사망 3.15 부정선거 - 김주열 열사 사망 - 4·19 혁명의 순서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난 1편에서 김주열 학생의 사망과 시신 유기 과정을

kiss7.tistory.com

4.19혁명(4.19의거)의 배경과 원인, 결과에서 드라마틱한 역사를 관찰하다

 

4.19혁명(4.19의거)의 배경과 원인, 결과에서 드라마틱한 역사를 관찰하다

[4.19혁명(4.19의거)의 배경과 원인, 결과에서 드라마틱한 역사를 관찰하다] 4.19혁명(4.19의거)의 배경은 장기집권을 노린 독재 4.19혁명 또는 4.19의거는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의해 제1공화국이 무너

kiss7.tistory.com

역대 대통령 선거와 당선 대통령 지지율 - 1. 이승만, 윤보선

 

역대 대통령 선거와 당선 대통령 지지율 - 1. 이승만, 윤보선

[역대 대통령 선거와 당선 대통령 지지율 - 1. 이승만, 윤보선]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 우리나라는 6개의 공화국과 11명의 대통령 당선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대통령은 겨우 36%의 지지율로 당선되

kiss7.tistory.com

 

[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건 -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 부검과 시신 1]

키스세븐지식은 키스세븐과 그룹 사이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