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라 로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복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손드라 로크의 재판 과정을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타의 뒷면이 드러나서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이며 감독이며 작곡가이며 정치인입니다. 미국 보수주의의 모범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할리우드에서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로도 꼽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거의 대부분 칭찬 일색의 문서만 있습니다. 그런데 손드라 로크와의 관계가 어떠했길래 구설수가 생긴 것일까요...
이 글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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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드라 로크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재판 사건과 찌질한 복수]
손드라 로크는 누구?
'손드라 로크'는 1960년대에 영화배우로 데뷔한 배우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열네 살의 나이 차로 만났습니다. 이때 그녀는 앤더슨이라는 남자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게이였지만, 감성이 통했기에 결혼을 강행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주 우연히 배우를 하게 되었는데, 첫 작품부터 대박을 쳤습니다. 데뷔하자마자 1969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그 후 바로 주연급이 됩니다. 이스트우드와는 그가 감독한 《무법자 조시 웨일즈》에 출연했다가 연인이 됩니다.
그 후 1975년부터 14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권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보수주의적 생각이 깊은 그는 여자가 순종하길 바라고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영화도 자신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에만 출연하라고 했습니다.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손드라 로크는 더 이상 주연 여배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연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영화 공부를 한 후 만든 첫 영화는 1986년의 《랫 보이》입니다.
한편 이혼도 하지 않고 동거를 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매우 가부장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시로 대했고, 잠자리도 자연 피임법만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손드라 로크는 자궁 내 피임 기구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못 하게 하고 자신도 피임 기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문제는 그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도 피임 기구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녀는 두 번이나 낙태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불임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 놓고 그는 다른 여배우와 바람을 피우며 두 명이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손드라 로크의 재판
그녀가 감독으로 자신의 삶을 열어가려고 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두 사람은 크게 다투게 되었고, 1988년 헤어지게 됩니다. 이때 그는 로크가 촬영을 나간 동안 집 열쇠를 바꿔버립니다.
영화 촬영 현장에 나간 사이 그가 그녀의 물건을 다 치워버리고 열쇠를 바꾼 것이니, 말하자면 쫓겨난 것입니다. 억울했던 손드라 로크는 1989년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에 그는 위자료와 함께 집을 하나 주었고, 영화사 워너브러더스가 로크의 영화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3년 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시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로크는 30개도 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워너브러더스가 모조리 거부하고 감독으로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것을 그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손드라 로크를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연예계에서 추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후 1999년 최후 재판에서 그녀가 이겼고, 이 재판은 로스쿨 교재에서 "선의에 대한 법적 개념"의 사례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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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드라 로크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재판 사건과 찌질한 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