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릉전투 이후 유비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삼국지에서는 왜 기록이 많지 않은가요?
A 유비 죽음 - 삼국지 유비가 이릉전투 이후 죽음을 맞기까지의 흐름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패배한 후 백제성에 머물던 기간의 사건은 그리 많지 않아서 큰 과정이 없습니다.
관우가 죽기 전까지 촉나라와 오나라는 화친관계였습니다. 연합해서 위나라를 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나라가 화친을 깨고 촉나라인 형주성을 쳐서 빼앗게 됩니다. 형주성은 촉과 오의 경계면서도 위촉오 삼국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은 전략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우가 오나라에게 죽게 되고, 유비는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조자룡 등 촉의 신하들은 말렸지만, 유비는 고집을 부리고 오나라를 공격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질적으로는 10만 명이 안 되는 병력이었습니다.
유비 죽음 - 삼국지 유비가 이릉전투 이후 죽음을 맞기까지의 흐름 / ⓒ kanegen
오는 급히 위나라에 항복하여, 촉과 싸우는 동안 위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유비에게도 사과하며 화친을 제의했으나 유비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장비도 죽고 삼국지 초기에 활약하던 촉나라의 1급 장수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죽습니다. 제갈량과 조운이 유비가 없는 나라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유비가 대동한 장수들은 흔히 말하는 2진급들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유비가 유리했습니다. 오나라 깊숙이 진군하여 승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오나라는 되도록 큰 전투를 벌이지 않고 후퇴하며 전열만 정비했습니다. 이것은 전투지휘를 맡은 육손의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유비가 보급로를 잘 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할 틈이 없었던 것도 이유입니다.
이렇게 거의 1년 가까운 오랜 전쟁을 하자 촉군과 오군은 다 지쳐갔습니다. 이때 육손은 유비의 허를 찌르며 화공을 했고, 유비는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때 유비의 수많은 장수들이 항복을 하고 촉나라 군대 전체가 전열이 흐트러집니다. 유비는 재공격을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오나라도 촉을 끝까지 쫓을 수 없었습니다. 위나라가 호시탐탐 노리다가 촉과의 싸움에서 지친 오나라로 쳐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비도 수도로 가지 않고 백제성에 머물며 기회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운이 다 되었는지 유비는 백제성에서 죽게 됩니다. 관우의 원수를 갚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국의 수많은 대신들이 반대하는 전쟁을 고집으로 강행했음에도 대패했으니 속병이 생겨서 죽은 것입니다.
유비는 죽으면서 제갈량과 이엄에게 후사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들 유선의 됨됨이가 군주의 수준이면 지극히 보필하고, 그럴 위인이 못 된다면 제갈량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에 울며 유선에게 충성을 다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이게 전체적인 흐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