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체조 수업 사건 - 이화여대 일화]
현재의 이화여대와 이화여고는 이화학당에서 시작했습니다. 이화학당은 1886년에 조선 한성부에 설립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여자를 밖으로 돌리지 않던 유교 관습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 처음에는 학생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90년에 박영효가 딸을 이화학당에 보내면서 상류층의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나마 돈 좀 있고 권력 좀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했던 것이 교육입니다. 그러다가 1893년 양반가들의 대찬 항의를 받으며 위기를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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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체조 수업 사건
이화학당이 문을 연지 6년째 되던 1892년, '조세핀 페인'이 제3대 당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녀는 학당을 맡자 우선 체육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개화기라 아직 현대적인 의료시설도 제대로 없었고, 영아 사망률도 높았습니다. 페인은 건강한 신체를 위해서는 체육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쉽게 퍼지는 당시, 어린 학생들 병으로 인해 학업을 쉽게 그만두고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하자 체육 교육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화학당 체조 수업 사건 - 이화여대 일화 / ⓒ 이화여대)
페인은 우선 체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언더우드 학당에서는 이미 1891년부터 매일 1교시에 체조 시간을 30분씩 하고 있었으니 그녀도 체조 시간을 배정해서 학생들에게 체조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엉뚱하게 사회적인 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이화학당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성고등여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체조 교육 중에 팔다리를 벌리는 체조를 시킨 것이었습니다. 여학생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을 위로 번쩍 들어야 했고, 다리를 활짝 벌려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양반집 가정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유교적 관습이 심각했던 그때, 양갓집 규수는 걸을 때도 조신하게 걸어야 했으며 발을 크게 내디뎌서 활발하게 걷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화학당 체조 수업 사건 - 이화여대 일화 / ⓒ 박경자)
윤리문제가 된 이화학당 일화
그런 시대에 여자에게 발가랑이를 활짝 벌리라고 하니, 학부형들은 이것을 윤리적인 논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학부형들은 가족회의를 열어서 딸 때문에 가문을 망치게 생겼다고 걱정하기도 하고, 이 사실을 안 어떤 집안에서는 이화학당을 다닌 규수는 며느리로 삼지 말아야겠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파문이 커지자 학부형들은 하인을 보내서 딸을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화학당은 기숙사 방식으로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후 4시까지 수업한 후 9시에는 잠자리에 드는 시스템이었기에 일단은 그냥 빼내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화학당 체조 수업 사건 - 이화여대 일화 / ⓒ Methodist Episcopal Church)
마침내 한성부에서는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서 체조 과목을 없애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페인은 학생의 체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계속 체조 교육을 강행했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그녀의 꾸준한 운동에 의해 학생들의 체력은 점점 좋아졌고 질병으로 학업을 그만두는 학생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파문과 윤리문제로 확산된 황당한 난리는 3년 후인 1895년이 되어서야 진정됩니다. 고종이 교육입국조서를 공표하면서 덕, 체, 지를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 조서의 10조에는 직접 체조를 익히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습니다.
보수주의가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절의 황당한 해프닝이 지나간 후, 우리나라에서도 여자가 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후 여학생들도 농구를 하고 체육 시간에 뜀박질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화학당 체조 수업 사건 - 이화여대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