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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사람&일화

남수단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2020. 1. 15.

[남수단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어떤 사람은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듯 외치고, 어떤 사람은 그런 말 한마디 없이 희생과 봉사로 모범을 보입니다.

'슈바이처'는 20세기 초에 아프리카에서 지극한 헌신을 한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남수단의 슈바이처라는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그 역시 묵묵히 봉사했던 성직자입니다.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참된 종료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누구인가?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목사님입니다. '이태석'은 신부님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다 아무 조건 없이 어렵고 힘든 자들을 도운 아름다운 마음씨의 사람이었습니다.

이태석은 1962년 부산에서 10남매 중 아홉 째로 태어났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자갈치 시장에서 일하여 아이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힘든 생활이지만, 어머니는 못 하는 게 없는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웠다고 합니다. 수학, 음악 등에 다재다능했고 종교활동도 열심이었으며 인성마저 좋다는 칭찬을 듣는 아들이었습니다.


사진: 남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린 이태석 신부와 아이들(남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린 이태석 신부와 아이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 ⓒ 이태석)


수학도 매우 잘했지만 오르간, 첼로 등을 혼자 독학으로 배울 정도로 잘했다고 합니다. 교육청 주관의 작곡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태석이 신부가 되기로 한 것은 중1 때 '다미안 신부'의 영화를 보고나서부터입니다.. 그는 '한센병(문둥병)'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린 성직자였습니다.

이렇게 봉사에 관심이 많았던 청소년 이태석은 커서 고아원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고, '돈 보스코' 성인(어린이,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던 성직자)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인제대 의대에 입학했습니다. 군대에서는 군의관으로 복무했는데, 그러면서도 가톨릭 사제가 되는 꿈은 벌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의사 이태석은 1991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갑니다. 이때부터가 다큐 <울지마 톤즈>의 수단으로 가는 시작점일 수도 있겠습니다. 살레시오 수도회는 돈 보스코가 만들었으며, 가난한 어린이와 불우한 청소년을 돌보기 위해 설립한 단체였으니 말입니다.


사진: 어린이와 청소년을 사랑한 요한(세례명)(어린이와 청소년을 사랑한 요한(세례명)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 ⓒ 이요한)


남수단 슈바이처 이태석이 되기까지

이태석은 광주 가톨릭 대학을 나온 후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깊이 있는 신학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했던 '공고미노 수사'의 권유받고 케냐로 가기로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왜 거기까지 가냐는 질문에, 이태석은 아무도 거기에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는 끝내 케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봉사는 그 자체가 수도 생활의 하나라고...


사진: 학교를 짓고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학교를 짓고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 ⓒ KBS)



이태석은 케냐에서 더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그리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은 20년 동안 내전을 겪고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착한 곳이 바로 '톤즈'입니다. 여기가 다큐 울지마 톤즈의 배경이 되는 곳입니다.

지금은 '수단'과 '남수단'으로 분리독립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북수단의 학대 때문에 남수단이 항전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장기 집권의 독재를 했고, 가난한 국민을 위해 쓸 돈으로 무기를 샀습니다. 더구나 톤즈는 헬리콥터로 4시간을 날아가야 전화 한 통을 걸 수 있는 오지였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성당을 먼저 지을까, 학교를 먼저 지을까?" 이태석 신부님의 결론은 학교였습니다. 그는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수학을 직접 가르쳤습니다. 악기도 가르치고 밴드도 만들었습니다.

남수단 사람들은 그를 "쫄리"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이것은 그의 세례명 '요한(John)'과 이씨 성(Lee)을 이어서 부른 이름입니다. 원래는 "이요한"이나 "존 리"가 되어야겠지만, 남수단인들은 쫄리를 애칭처럼 불렀다고 합니다.


사진: 이태석은 음악도 재능이 있었기에 밴드도 만든다(이태석은 음악도 재능이 있었기에 밴드도 만든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 ⓒ KBS)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이태석은 의료 봉사를 하고, 예방접종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한센병은 옮기기 때문에 위험한 진료 봉사지만,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 위해 개인 재산을 털어 병원도 운영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수단이었지만, 반군들도 그의 치료를 받았기에 병원 근처에서는 전투를 조심했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가장 힘든 곳에서 가장 어려운 헌신으로 8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휴가를 보내기 위해 한국의 가족에게 방문했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이태석은 한센병의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했다(이태석은 한센병의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 ⓒ 살레시오회)



병원에 들렀다가 알게 된 것은 대장암 말기라는 충격적인 판정... 그러나 이태석은 수단에 파고 있던 우물 사업의 계획이 어긋날까 봐 걱정이 앞섰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은 치료를 먼저 하자고 설득했고, 한국에서의 1년간의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던 그가 한 거짓말은, 주변 사람들이 마음 아플까 봐 암도 아프지 않다고 한 거짓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병은 치료 시기를 이미 놓쳐서 더욱 나빠졌습니다. 결국 2010년, 이태석 신부님은 ‘Everything is good!(모든 것이 좋았다)’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했습니다.




이태석은 죽기 전날, 꿈에서 돈 보스코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사랑하던 두 성인은 그렇게 교통했나 봅니다. 그 후, 2019년에 남수단의 교과서에는 그의 이름이 실렸습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헌신했던 봉사 정신을 남수단의 아이들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다큐 <울지마 톤즈>, 2012년 <스마일 톤즈>가 방영되었고, 울지마 톤즈의 2편인 <울지마 톤즈: 슈크란바바>가 2020년 개봉하였습니다.

진정한 종교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힘든 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것, 그것이 진짜 종교일 것입니다.


사진: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에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던 이태석(항암치료로 빠진 머리에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던 이태석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 / ⓒ 살레시오회)




[남수단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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