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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맥그린치 신부(임피제 신부) -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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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맥그린치 신부(임피제 신부) -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키스 키스세븐 2017. 10. 2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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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맥그린치 신부(임피제 신부) -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힘든 삶이 고될 때, 어려운 난관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교훈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맥그린치 신부(임피제 신부)는 제주 성이시돌목장을 성공시키며, 도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한국 생활 60년이 넘어서, 이제는 한국인이라고 불러야 할 제주도 외국인 신부에 대한 미담을 소개합니다. 




[글의 순서]

1.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

2.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3.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


가난과 전쟁이 휩쓸고 간 후진국, 1950년대의 대한민국에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가 선교를 하러 왔습니다. 그는 일터를 만들고, 돈을 벌게 해 주고, 제주 성이시돌 목장을 크게 성공시켰으며, 이제는 무료 복지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제주도의 외국인 신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입니다. 


사진: 방송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고 있는 맥그린치 신부. 한국 이름으로 임피제 신부이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사진: 방송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고 있는 맥그린치 신부. 한국 이름으로 임피제 신부이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 / ⓒ MBC)


패트릭 제임스의 한국식 이름은 '임피제 신부'입니다. 그는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한국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1953년 강원도에서는 6.25 전쟁 중에 일곱 명의 신부가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로인해 다섯 명의 선교사가 추가로 파견되었는데, 그 중에 맥그린치 신부(임피제 신부)가 있었습니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요코하마, 부산을 거쳐서 최종 도착한 곳은 제주도 '한림'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제주 전통가옥의 모습. 외국인 신부 임피제는 한국이 가장 가난한 때, 그것도 4.3사건으로 더욱 어려웠던 제주도에 선교를 왔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사진: 제주 전통가옥의 모습. 외국인 신부 임피제는 한국이 가장 가난한 때, 그것도 4.3사건으로 더욱 어려웠던 제주도에 선교를 왔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 / ⓒ monstar6)


제주도 한림은 한라산에 오르는 중간 지대 정도의 높이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맥그린치 신부가 막상 한림에 도착하고 보니 신도는 겨우 25명뿐이었고, 그 마저도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많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막막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찢어지게도 가난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제시대와 4.3사건, 한국전쟁의 상처는 너무도 컸으니, 선교보다도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사진: 제주 한림읍의 위치. 고산지대의 중간높이 정도의 외진 마을에서 임피제 신부는 목장을 일구기 시작했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사진: 제주 한림읍의 위치. 고산지대의 중간높이 정도의 외진 마을에서 임피제 신부는 목장을 일구기 시작했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 / ⓒ 구글맵, www.kiss7.kr 편집)


그런 가난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사람들은 순박하고 따뜻했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도 임피제 신부에게 보리쌀을 챙겨서 가져다주고, 닭과 달걀을 싸다 주었다고 합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도의 첫인상에 대해 겉으로 보기에는 타인에게 퉁명스러웠지만 은근한 인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들은 머나 먼 타국 땅에 온 선교사를 굶기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진: 임피제 신부의 젊은 시절의 모습. 고향인 아일랜드와 비슷한 환경의 제주도에 애정을 가지고 60여 년을 살았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사진: 임피제 신부의 젊은 시절의 모습. 고향인 아일랜드와 비슷한 환경의 제주도에 애정을 가지고 60여 년을 살았다. [제주도와 맥그린치 신부] / ⓒ jnuri.net)


맥그린치 신부의 고향인 아일랜드와 비슷한 제주의 풍경도 정겨웠습니다. 아일랜드도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해안가 고지대로 이루어진 섬입니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와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말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서양인이라고 하면 미국인 밖에 몰랐던 마을 사람들은 한국말을 잘 모르는 맥그린치 신부에게 자기들끼리는 "미국 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임피제 신부는 "저는 아일랜드 놈이예요"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제주도 임피제 신부는 선교보다 더 급한 것이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변소에서 기르는 '똥돼지'를 보고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고향인 아일랜드도 목축업으로 유명한 나라였기 때문에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도에서 가축사업을 하여 주민들을 배불리 먹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수의사였고 어린 시절부터 가축을 길렀던 그였으니 말입니다. 


사진: 맥그린치 신부의 젊은 시절 흐릿해진 낡은 사진의 모습.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사진: 맥그린치 신부의 젊은 시절 흐릿해진 낡은 사진의 모습.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 ⓒ 임피제 신부)


이때 맥그린치 신부가 시작한 사업이 성장하여 지금의 '성이시돌목장'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매우 보수적인 어른들은 협조도 해주지 않고 그저 안 된다고만 했습니다. 화산섬에서 무슨 목축이냐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도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정부도 못했으니 안 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임피제 신부의 목초지 개발에 반대하고 나서는 어른도 있었습니다. 


사진: 성이시돌 목작을 만들 때의 4H 회원들과의 기념사진. 어른들이 새 사업에 호응을 해주지 않자 어린 청소년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사진: 성이시돌 목작을 만들 때의 4H 회원들과의 기념사진. 어른들이 새 사업에 호응을 해주지 않자 어린 청소년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 ⓒ 맥그린치 신부)


한번 고집하면 여간해서는 바뀌기 힘든 보수적인 어른들을 포기하고, 제주도 임피제 신부는 청소년들과 '4H'를 조직하여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4H는 세계적인 "청소년 계몽운동"을 말합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천주교 재단과 교향 등에 편지를 보내 후원금을 마련했습니다. 해외로 나가서 직접 후원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성이시돌목장 인근의 농축업 경영자들 중에는 그때 4H조직에 함께 했던 청소년이 많습니다. 


사진: 성당 신도들과의 기념사진. 제대로된 사제관도 없는 성당에서 사역을 하며 지역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사진: 성당 신도들과의 기념사진. 제대로된 사제관도 없는 성당에서 사역을 하며 지역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 ⓒ 맥그린치 신부)


맥그린치 신부는 4H 회원들과 함께 목장으로 수로를 파고, 경제적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주민들에게 돼지, 닭 등을 나눠줬습니다. 분양료를 대신해서 새끼를 많이 낳으면 새끼 두 마리를 다시 받는 조건입니다. 이렇게 받은 새끼들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분양해서 계속 수를 늘려갔습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 어르신들은 팔아버리거나 잡아먹기도 했지만, 계속 추진하다 보니 성이시돌목장과 주민들의 가축이 1만 마리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정부도 못해내는 일을 해 내자 당시 대통령이 직접 만나서 맥그린치 신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사진: 정부도 못해내는 일을 해 내자 당시 대통령이 직접 만나서 맥그린치 신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제주 성이시돌목장 성공기] / ⓒ 대통령 기록관)


드디어 1960년대가 되자 성이시돌목장이 정식으로 개설되고 사료공장도 지었습니다. 해외로 수출도 시작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직접 냉동육을 가공하여 수출하기까지 성장하였습니다. 한때 돼지고기 파동으로 위기를 격기도 했으나, 황소와 젖소도 사육하면서 위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임피제 신부와 같이 일하던 4H 회원들은 돼지를 분양받아서 독립도 했습니다. 이렇게 맥그린치 신부는 우리나라와 지역경제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


대한민국 최초의 현대적 유기농 목장이었던 성이시돌목장은 제주도 한림읍 금악동길에 있습니다. "성 이시돌"은 농부 출신의 성직자로 12세기 스페인의 성인입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며, 패트릭 제임스에서 따와서 "임피제"라고 지었습니다. 이후 60여 년을 한국에 살며 이제는 한국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선교와 성이시돌목장 이외에도 '한림수직', '신용협동조합'도 설립했습니다. 


사진: 경제난에 의한 사망소식에 안타까워서 한림수직을 만들었다. 여기서 양털을 이용한 것들을 만들었으며 주민들을 직원으로 채용해서 월급을 주었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사진: 경제난에 의한 사망소식에 안타까워서 한림수직을 만들었다. 여기서 양털을 이용한 것들을 만들었으며 주민들을 직원으로 채용해서 월급을 주었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 / ⓒ 임피제 신부)


이전의 제주도 한림 인근의 주민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집에 허덕이다가 자살을 하기도 하고, 외지에 돈 벌러 갔다가 공장 사고로 죽기도 했습니다. 이를 본 맥그린치 신부는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직접 한림수직을 운영했습니다. 여기에서 적어도 1300명 이상이 직장을 얻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임피제 신부는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서 무담보로 대출도 해주었습니다. 


사진: 건립된 한림성당 앞에서의 4H 회원들과의 사진. 현재는 제주도의 천주고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사진: 건립된 한림성당 앞에서의 4H 회원들과의 사진. 현재는 제주도의 천주고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 / ⓒ 맥그린치 신부)


맥그린치 신부는 가축을 키워서 수출을 하며 주민의 경제수준을 높이고, 그 수익을 다시 복지사업에 재투자하였습니다. 성이시돌목장 사업사에서는 중병환자를 무료로 치료하는 호스피스를 운영 중이며, 역시 무료로 양로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소년 센터, 어린이집, 피정센터 등의 약자를 위한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수녀원, 금악성당, 은총동산까지 일구어 지금은 천주교 성지처럼 되었습니다. 그 공로로 임피제 신부는 막사이사이상과 석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성이시돌 목장을 일구는 맥그린치 신부의 모습. 이제는 복지사업에 치중하여 무료 호스피스, 양로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사진: 성이시돌 목장을 일구는 맥그린치 신부의 모습. 이제는 복지사업에 치중하여 무료 호스피스, 양로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제주도 임피제 신부의 선행] / ⓒ 임피제 신부)


제주도 임피제 신부는 성당을 짓던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난파한 배에서 목재를 겨우 얻었지만 어린 아이까지 포함해도 25명밖에 되지 않는 신도들로는 운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일찍 4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운반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 이들이 모인 광경에 맥그린치 신부는 감격스러워했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힘든 고난이 닥칠지라도 용기와 희망이 함께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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