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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 걸레가 되어 세상을 밝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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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 걸레가 되어 세상을 밝히다

키스 키스세븐 2019. 12. 2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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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 걸레가 되어 세상을 밝히다]

이 글은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님의 일화와 김일성 인연, 독립운동 등을 다룹니다.


어떤 사람은 나서길 좋아하며 국가를 혼란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뒤에서 익명으로 헌신하며 나라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런 헌신의 인물 중에서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를 기려봅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지만, 다른 종교라 할지라도 봉사와 헌신의 참된 의미로 본받고 새겨 둘만한 사람입니다. 약한 자와 고난에 처한 국가를 위해 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의 삶을 흩어보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보수 자본가 편에 서서 나라의 혼란만 부추기는 종교인들은 그를 보며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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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목사가 걸레성자가 되기까지

'손정도' 목사님은 기울어 가는 조선 말, 1872년 평안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생 걸레 정신으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된다. 나는 걸레의 삶을 살겠다" 버려지더라도 그 역할을 기꺼이 맡겠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이 말은 걸레성자 손정도의 성품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유림이었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유교 가문에서 자랐고, 한문을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했었습니다. 이런 그가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은 것은 과거를 치러 가다가 평양에 머물게 되면서부터입니다. 1902년, 조 목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던 그는 그날 밤 크리스천이 됩니다.


사진: 손정도 목사님과 당시 동료 목회자들(손정도 목사님과 당시 동료 목회자들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김일성 안창호 손원일] / ⓒ 손정도기념사업회)



손정도는 그날 상투를 자르고 과거 시험을 포기합니다. 원래 열정적이었던 그는 교리에 감동하여 바로 새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그를 본 집안 어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하늘에서 떠나라는 음성이 들렸고, 그렇게 해서 고향을 떠나 평양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숭실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 '조만식', '김형직'을 만나게 됩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입니다. 손정도와 '김일성'의 인연은 김형직과의 친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후 손정도는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전도사의 길을 갑니다.



감리교에서 활동하던 손정도는 1910년 청나라에 선교사로 파견 나갔습니다. 여기서 '조성환'과 '안창호'를 만나서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걸레성자 손정도와 안창호는 의형제처럼 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국에서는 일제에 강압적으로 '한일병탄'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하얼빈을 개척하고 조선인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데라우치' 암살 모의사건 혐의로 그를 잡아들였습니다. 독립운동 동지들의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자, 전기고문과 불로 지지는 고문을 받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진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 이 고문의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사진: 다큐방송의 손정도 고문 재현 장면(다큐방송의 손정도 고문 재현 장면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김일성 안창호 손원일] / ⓒ KBS)


유배지에서도 주민을 위해 봉사와 선교를 하던 그의 유배가 풀린 것은 2년 후였습니다. 그 후 '동대문교회'에 그가 나타나자 감동받은 신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1915년부터는 '정동교회'에 있었는데, 남자와 여자를 갈라서 예배를 보던 방식을 개혁하며 진보적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손정도의 부인 '박신일'과 가족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은 낮에 잡역일을 하고 밤에 재봉틀을 하며 빈곤을 견뎠지만, 일제의 감시는 점점 더해갔습니다. 부모와 부인, 아들, 손자 등 그의 가족은 8명이나 옥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부인 박신일은 남편을 잡으려는 일제 경찰에게 끌려가서 모진 매질을 당하고 밤새 신음을 앓았습니다. 손정도의 아들 '손원일'도 아버지가 손정도 목사라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손원일은 나중에 첫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이 되는데, 인천상륙작전에서 한국군을 직접 지휘했던 인물입니다.


사진: 손정도, 손원일, 김일성을 만난 손태원(손정도, 손원일, 김일성을 만난 손태원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김일성 안창호 손원일] / ⓒ 손정도기념사업회)




걸레성자 손정도의 헌신

손정도 목사님은 독립운동에 크나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1919년 '손병희'를 설득해서 민족대표 33인에 들어오도록 했고, 3.1운동 계획에 참여했으나 쫓겨서 상하이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현순',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만들기로 합니다. 걸레성자답게 손정도는 뒤에 서서 익명으로 실무 일을 맡습니다. 가장 중요한 독립자금 모금과 운영을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공은 숨기고 남을 치켜세워 뒷바라지하는 손정도의 헌신은 지극했습니다. 더구나, '안중근' 의사가 죽자 그의 유족들을 자신의 집에 살도록 했고, 빈곤한 조선인들을 보살피고 먹여 살리기도 했습니다.


사진: 안창호와 손정도. 임시정부의 이승만 환영회 사진(왼쪽 끝)(안창호와 손정도. 임시정부의 이승만 환영회 사진(왼쪽 끝)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김일성 안창호 손원일] / ⓒ 손정도기념사업회)


걸레처럼 항상 궂은 일만 했기 때문에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손정도는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었으며 '김구'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용단'을 조직했습니다. 또한 세계에 독립 진정서를 보내는 등의 호소를 했고 '이승만'을 설득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922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였는데, 교회와 교육 활동을 하며 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특히 안창호와 한인 이상촌을 건설하려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헌납해서 조선 난민들에게 땅을 나눠주며 한민족의 경제 자립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손정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며 "이웃사랑이 민족사랑"이란 것을 실천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기득권에 달라붙어서 분열을 일삼는 몇몇 기독교인들은 그를 보며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김일성과 손정도의 일화는 이렇습니다. 1926년 김일성은 아버지가 죽자 중국 길림으로 향합니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손정도는 그를 받아들이고 한 가족처럼 살았습니다. 그 후 김일성은 사회주의 독립운동 계열로 활동하다가 잡혀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때 손정도가 그의 옥바라지를 했고, 뇌물을 주어 석방되게 도왔습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손정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이며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인들을 위해 재산을 헌납하고 봉사하던 사업은 끝이 나고 맙니다. 결국 손정도는 밀정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손정도 가족과 김일성 가족 사진(손정도 가족과 김일성 가족 사진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김일성 안창호 손원일] / ⓒ 손정도기념사업회, Getty Images)



1931년, 마침내 걸레성자 손정도는 60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린 데다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헌신과 봉사에 열정을 쏟았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광복이 된 후, 아들 손원일과 가족들은 남한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손원일은 총대 해군참모총장으로 활약하며 김일성과 싸웠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손정도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나중에라도 그의 후손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손정도의 둘째 아들 손원태의 80회 생일 파티를 평양에서 열어서 정말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걸레성자 손정도는 자식들에게 항상 말했다고 합니다. "천대받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는 과학, 산업사회가 될 것이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항상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최선을 다하던 그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대한민국의 현대를 예고했습니다. 교육 사업과 민족 사업에 최선을 다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기독교의 의미는 핍박받는 약자의 편에서 사랑을 가르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종교는 그 정신을 잊은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걸레성자 손정도 목사 - 걸레가 되어 세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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