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국내 운동 - 물산장려, 브나로드, 신간회, 6.10만세]
3.1 운동 이후, 그러니까 1919년 이후부터 민족운동은 국내와 국외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국내의 운동은 일제의 감시와 한계로 인해 사회, 교육, 만세 등의 운동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외에서처럼 직접적인 독립투쟁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평화적 국내 민족운동은 민족 전체가 광복을 소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열로 인해 뭐 하나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내 살림 내 것으로", "우리 것으로만 살자"!
설명 : '물산 장려 운동'은 일본 기업이 조선에 진출하면서 조선 경제가 침략당하는 배경 때문에 전개되었습니다. 일본 상품은 관세도 물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까지 싸져서 조선 사업자들은 큰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자 '조만식' 등이 장려회를 설립하고 일본 상품을 배격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물산 장려 운동은 검소한 생활과 저축운동, 그리고 금주, 금연 운동까지 벌였습니다.
(물산장려운동 신문광고.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의 이익농간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물산장려, 브나로드, 신간회, 6.10만세운동] / ⓒ 국사편찬위원회)
한계 : 국산품 애용 운동이었지만, 민족 기업은 자본과 생산력이 너무 약했습니다. 더구나 상인과 자본가들이 국산품 애용 운동을 핑계로 농간을 부리며 가격을 높여서 자기 배만 불렸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영세한 서민들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물산 장려 운동은 성공하지 못한 운동인 것입니다.
(기회주의자들의 이익 농간을 보고 사회주의자들이 비판한 운동이기도 하다 [물산장려운동 6.10만세운동 브나로드 신간회] / ⓒ Unknown)
사회주의자의 생각 : 평등과 공평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런 상황은 돈 많은 부자만 배를 불리는 이기적인 운동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의 등을 쳐 먹고 부자들만 이익을 챙기는 상황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임을 비판하였습니다.
(조만식 등이 시작한 운동이다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6.10만세운동 브나로드] / ⓒ 국가보훈처)
그럼에도 중요한 점 : 물산 장려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은 우리 경제, 국산품 애용이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전 국민이 참여하는 첫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매우 중요한 핵심 사건임을 알아둬야 할 것입니다.
핵심 : 민족주의 → 물산장려운동, 사회주의 → 물산장려운동 배신자 비판
사회진화론에 항거하라!
설명 : 3.1 운동 이후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동등한 교육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초등, 실업계 학교에만 그쳤습니다. 일본은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싫어했지만, 단기간에 독립하지 못할 것을 안 지식인들은 인재양성이 필요했기에 '민립대학 설립' 모금운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농촌에는 '브나로드 운동'으로 문자 보급에도 신경 썼습니다.
(브나로드운동은 사회주의 영향으로 동아일보에서 지작했다 [6.10만세운동 브나로드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 ⓒ Unknown)
한계 : '이상재' 등이 모금운동을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을 달랠 목적으로 일본은 '경성 제국 대학(서울대학교)'이나 만들어 줍니다. 우리 내부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간접적인 민족운동이다 보니 대충 타협하고 느긋하게 고쳐나가자는 사람들 때문에 민족 운동이 분열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민립대학운동은 겨우 경성제국대학 하나 세워 준 후 일제가 방해한다 [브나로드 물산장려운동 6.10만세운동 신간회] / ⓒ 서울대학교 의학사교실)
브나로드 운동 : 전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과 함께 농촌에서 벌어진 계몽 운동입니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서 '동아일보'가 일으켰습니다. 학생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글자를 가르쳐 주고 교육을 해 줬던 것입니다.
(노동자 하류층이 늘어나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주의도 늘어났다 [6.10만세운동 신간회 브나로드 물산장려운동] / ⓒ EBS)
그럼에도 중요한 점 : 모금운동도 잘 안 되고 일본의 방해 속에서 민족 운동자들끼리 분열되어 버렸지만, '사회 진화론'을 사상적 배경으로 국민의 지식을 높였다는 점은 긍정적입니다. 일본이 본 사회진화론은 강한 자가 침략해도 된다는 것이었으나, 조선이 본 사회진화론은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핵심 : 사회진화론 → 민족주의의 민립대학 운동 → 경성제국대학, 사회주의 → 문자 보급과 브나로드 운동
기회주의 배격하자면서 타협주의가 되다니!
설명 : 1920년대는 '사회주의 사상', '6.10 만세 운동', '신간회',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이 대표됩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물산 장려 운동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문자 보급, 브나로드 운동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뉜 것을 단결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순종 출상에 맞춰 시작된 6.10만세운동. 사회주의가 앞장섰다 [신간회 브나로드 6.10만세운동 물산장려운동] / ⓒ 국가보훈처)
한계 : 6.10 만세 운동이 벌어진 후 자극을 받아 단결하려던 운동이 신간회입니다. 하지만, 강령에서는 기회주의자를 배격한다고 해 놓고도 타협 주의자들이 생겼기에 다시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국내 운동은 신간회가 설립됐어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등으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일제의 탄압까지 받고 약해집니다.
(민족주의의 사회주의 분열을 막고자 신간회가 시작되었다 [브나로드 6.10만세운동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 ⓒ 국가보훈처)
1920~30년대 민족운동의 문제점 :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등 각각의 계열에서는 열심히 운동을 하였지만, 힘이 부족한 데다가 서로 갈등까지 겪어서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이를 통해서 민족 개개인이 깨달은 점이 많았겠지만, 국내에서는 간접적인 독립운동으로 추진력이 부족하였습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여학생 희롱사건으로 시작되었지만 일제는 신간회도 탄압했다 [물산장려, 브나로드, 신간회, 6.10만세] / ⓒ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그럼에도 중요한 점 : 천도교와 사회주의가 앞장서서 3.1 운동처럼 일으킨 것이 6.10 만세 운동이었습니다. 6.10 만세 운동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고, 이에 자극받아서 단결하려고 신간회도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민족분열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에서 여학생 희롱사건으로 벌어진 학생 항일 운동도 젊은 학생들의 사회 참여였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핵심 : 분열 → 사회주의의 6.10 만세 운동 → 신간회로 단결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탄압